상우의 목소리가 페이드 아웃되면서 카오디오도 함께 꺼져버렸다. 다행히 시동은 걸려 있는 상태였다. 언제 또 무슨 문제가 발생할 지 알 수 없는 차였다. 클러치에서 발을 천천히 떼고 들어왔던 곳으로 차를 몰아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들어왔던 곳으로는 나갈 수가 없는 구조였다. 차들이 계속 대로 쪽에서 한강 공원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출구를 찾아야 했다. 차를 돌려 반대편으로 가보았다. 디스토피아를 그려보았던 곳까지 이르렀지만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걸을 때는 흔하게 보였던 것 같은 안내지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면서 정유소를 본 기억은 없었다. 난감했다. 주변을 좀 더 잘 살펴보려고 내려놓았던 차창으로 차 뒤편에서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점점 다가오고 있고, ..
얼마가 지난 걸까. 카누를 타고 노를 저어 달빛에 물든 강물의 한 가운데까지 나아갔다. 술잔을 물결 속으로 담궈 달빛을 길어올리다 황금물결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온 몸이 젖었고, 양볼을 개구리처럼 부풀린 채 깊은 강물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황금의 빛은 점점 사라지고 공포스런 어둠이 사방을 휘감았다. 물은 점점 차가워졌고, 온 몸이 얼어붙기 시작한다고 느낀 순간 정신이 들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이다. 온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돌았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다. 10분 정도 잠이 들었다. 하지만 어쩐지 전혀 다른 시간 속을 살다 돌아온 기분이었다. 앉아 있던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 일어 한 번 주저앉고 말았다. 두 번째 일어날 때는 이상이 없었다. 커..
이번에는 좀 더 인적이 드문 곳까지 걸었다. 지나온 길을 돌아다보니 지금 서 있는 곳이 비현실적인 공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바람에서는 조금씩 극점의 찬 기운이 더 실려왔다.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언제 꼈는 지 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일이 많았다. 음악은 귀로 들을 때보다 귀에 걸 때가 더 많아졌다. 음악은 지구의 인류 수가 늘어난 것 만큼 늘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세상의 음을 음악이 모두 덮어버리는 장면을 상상했다. 죽음의 순간에서야 인간은 귀에서 이어폰을 뺄 것이다. 강 저편에 펼쳐진 도시의 야경이 디스토피아의 미래 도시처럼 보였다. 그곳에서는 소수의 자본가가 석유를 독점할 것이다. 모든 나라는 수도 혹은 경제가 집중된 일부 도시에만 문명이 집중될 것이다. 그 도시는 커다란 성곽..
도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옮겨 가서는 근처 벤치에 앉았다. 여름밤이 내는 소리를 듣기 위해 음악을 껐다. 이어폰을 채 빼기 전부터 물결 소리며, 풀벌레 울음 소리며, 여름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이 내는 소리를 듣기 위해 수 십년 동안 바위에 앉아 밤하늘에 귀를 기울였다는 사람을 티비에서 본 적이 있었다. 잔 물결 위에 도시의 불빛들이 엎질러져 강물을 이색적으로 물들였다. 강물 아래에는 물고기들이 살고 있을까. 영화 의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 영화배우 배두나를 무척 좋아했었던 때가 떠올렸다. 물결의 부침에는 리듬이 있었다. 떠오르고 가라앉고 떠오르고 떠오르고 가라앉고 가라앉고 떠오르고 가라앉고 떠오르고 떠오르고 가라앉고 가라앉고 떠오르고. 그런 식이었다. 가져온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 다자이..
강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여름과 겨울이 반쯤씩 섞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강변의 벤치 위에 흰 런닝셔츠 바람으로 드러누운 중년의 남자가 보이는가 하면, 긴팔 운동복을 갖춰 입고 몸을 움츠린 채 경보를 하는 중년의 여자도 보였다. 이쪽 편에 놓인 아파트 단지의 불빛이 거의 꺼져 있는 반면, 강 건너편에는 더러 불빛들이 켜져 있었다. 지도를 보는 취미가 없었으므로 강 저편이 무슨 동인지는 알 수 없었다. 행정구역상의 어떤 마을이라기보다는 다른 행성처럼 느껴졌다. 조금 걷다보니 역시 바람에서 여름을 느끼는 빈도가 높아졌다. 이마 언저리에 땀방울이 맺혔다. 옷깃으로 아무렇게나 땀을 훔쳐냈다. 훔쳐낸 자리로 선뜻하게 바람이 불어들었다. 잔디를 보호합시다라고 쓰인 푯말을 보았다. 주위를 살폈다. 잔디 속으로 들어가..
무의미한 밤 열대야도 막바지였다.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어째서인지 잘 걸리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본네트를 열고 엔진 부근을 살펴보았다. 물론 엔진 구조에 대해 배운 것은 10여년 정도 전인 중학교 3학년 기술 시간이었다. 손가락 끝에 기름 때를 몇 번 묻혀보다가 다시 본네트를 닫았다. 운적석에 다시 앉아 시동을 걸었다. 특별히 한 일도 없는데 시동이 걸렸다. 차를 돌려 오래된 주공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새벽 1시. 입구에 가까워지자 뒤늦게 주공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을 차들이 제멋대로 주차되어 있었다. 간신히 빈 틈들을 찾아 차를 몰았다. 세 번째 난관에 봉착했을 때는 집으로 다시 들어가려고도 했다. 세번 째 난관이란 간신히 9인승 벤츠와 12인승 스타렉스 사이를 빠져나왔을 때 일어났다. 직진 방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