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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무의미한 밤 3

멀고느린구름 2013. 2. 24. 08:52




  강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여름과 겨울이 반쯤씩 섞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강변의 벤치 위에 흰 런닝셔츠 바람으로 드러누운 중년의 남자가 보이는가 하면, 긴팔 운동복을 갖춰 입고 몸을 움츠린 채 경보를 하는 중년의 여자도 보였다. 이쪽 편에 놓인 아파트 단지의 불빛이 거의 꺼져 있는 반면, 강 건너편에는 더러 불빛들이 켜져 있었다. 지도를 보는 취미가 없었으므로 강 저편이 무슨 동인지는 알 수 없었다. 행정구역상의 어떤 마을이라기보다는 다른 행성처럼 느껴졌다. 


  조금 걷다보니 역시 바람에서 여름을 느끼는 빈도가 높아졌다. 이마 언저리에 땀방울이 맺혔다. 옷깃으로 아무렇게나 땀을 훔쳐냈다. 훔쳐낸 자리로 선뜻하게 바람이 불어들었다. 잔디를 보호합시다라고 쓰인 푯말을 보았다. 주위를 살폈다. 잔디 속으로 들어가 걸었다. 달궈진 아스팔트보다 훨 시원한 느낌이었다. 신발을 벗어 들었다. 양말을 신고 있지 않았으므로 맨 발바닥이 풀에 닿았다. 차가운 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다음 번 밟힐 어둔 풀잎들이 냉정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차례차례 밟아가는 느낌은 묘한 죄책감과 성취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10분 쯤을 그리 걷다가 잠시 멈춰섰다. 주위를 살폈다. 신발을 풀밭 바깥 쪽으로 가지런히 내려놓고 발을 넣었다.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았다. 먼 데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운 곳의 풀들을 조용히 다시 일어나 있었다. 지나온 길들이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아 황급히 신발을 신었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았다. 내가 지나쳐온 길 쪽에서 남녀가 손을 맞잡고, 손을 맞잡지 않은 손에는 각자의 신발을 들고 풀밭 위를 걸어오고 있었다. 만족과 연민 사이의 미소를 떠올렸다. 


  가방 속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걸었다. 단자를 아이폰에 연결하고, 아이튠즈에 들어가 있는 곡들을 아티스트 정렬로 살폈다. 에피톤 프로젝트, 김동률, 이적, 델리스파이스, 언니네이발관, 노리플라이 등이 후보로 떠올랐다. 최종심에 오른 것은 델리스파이스와 언니네이발관이었다. 라이벌간의 대결이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이 떠있었다. 달빛이 유난히 밝아 주위의 별빛들을 모두 가리고 있었다. 심호흡을 해서 밤공기를 단전까지 들이켰다. 최종 우승은 언니네이발관이었다. 어쩐지 그런 밤이었다. 언니네이발관을 선택하고 곡은 고르지 않았다. 임의재생을 눌렀다. 아이튠즈는 ‘100년 동안의 진심’을 선곡했다. 썩 마음에 들었다. 둑 아래 쪽으로 걸었다. 좀 더 강을 가까이 두고 걸었다. 달빛에 드러난 밤의 강이 수줍게 흐르고 있었다. 찌처럼 시선을 강물 속에 던져놓고 걸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강물을 거슬러 걸어오르고 있었다. 물길은 반대쪽으로 묵묵히 흘렀다.‘100년 동안의 진심’이 끝났다. 다음은 ‘너는 악마가 되어가고 있는가?’였다. 관대하지 못한 밤이었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등을 두들기는 느낌이 들어 뒤돌아보았다. 미모의 20대 여성이었다. 조금 감격하고 말았다. 하지만 곧 조금 떨어진 뒤 쪽에 일행으로 보이는 조금 더 나이 들어보이는 20대 여성이 딴청을 피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고 쉽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초면에 이런 말씀 드리면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요, 요즘 밤하늘에 별이 너무 많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죠? 정말 심각해요, 이게 다 사람들이 일으킨 광공해 덕분이죠. 아뇨, 저기 그러니까...‘덕분’이라는 표현은 좀 아닌 것 같은데요. 네? 그니까 ‘덕분’이라는 건 뭔가 더 잘 됐을 때 쓰는 거잖아요, 이 경우는 나빠진 거니까 ‘덕분’이 아니라 ‘탓’이라고 하던가, 좀더 중립적인 표현으로는 ‘때문’이라고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아.. 네. 20대 여성은 당황했고, 결국 고개를 돌려 뒤의 일행을 전진하게 했다. 조금 더 나이들어보이는 20대 여성 쪽은 나까지 나서야 하다니 라는 듯이 거드름을 피우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화기가 많아요 당신, 세상에 불만 많죠, 사람 사는 게 왜 이러나 싶고, 외로워 죽을 것 같죠, 당신 속의 불길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고 있어, 당신을 연료로 해서 불타고 있어, 내가 본 사람 중에 당신 화기가 제일 엄청나요. 아, 네 그렇습니까. 라고 말하고 뒤 돌아서서 방둑을 올라왔다. 한계를 뛰어넘는 축지법을 구사했기 때문에 가랑이가 다소 아팠다. 뒤쪽에서 두 여자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전략회의는 치열하게. 그러고보니 미모의 20대 여성 쪽의 미모를 확인한 순간 아이튠즈의 음악을 꺼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리모컨의 플레이를 눌렀다. ‘너는 악마가 되어가고 있는가?”의 중간 간주가 흘러나왔다. 악마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2013. 2. 24.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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