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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무의미한 밤 5

멀고느린구름 2013. 2. 27. 20:35



  이번에는 좀 더 인적이 드문 곳까지 걸었다. 지나온 길을 돌아다보니 지금 서 있는 곳이 비현실적인 공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바람에서는 조금씩 극점의 찬 기운이 더 실려왔다.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언제 꼈는 지 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일이 많았다. 음악은 귀로 들을 때보다 귀에 걸 때가 더 많아졌다. 음악은 지구의 인류 수가 늘어난 것 만큼 늘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세상의 음을 음악이 모두 덮어버리는 장면을 상상했다. 죽음의 순간에서야 인간은 귀에서 이어폰을 뺄 것이다. 강 저편에 펼쳐진 도시의 야경이 디스토피아의 미래 도시처럼 보였다. 그곳에서는 소수의 자본가가 석유를 독점할 것이다. 모든 나라는 수도 혹은 경제가 집중된 일부 도시에만 문명이 집중될 것이다. 그 도시는 커다란 성곽으로 둘러 싸일 것이다. 성곽에는 최첨단 경비 프로그램이 가동될 것이다. 성곽 밖의 인간은 짐승과 다름 없을 것이다. 성곽 안 도시 속에서도 일부만이 부를 독점하고 그 외의 인간은 부를 재생산하기 위한 산업 인재로서만 육성될 것이다. 인간은 소비와 기능으로서만 존재가치를 유지할 것이다. 철학과 문학은 사라질 것이다. 인간은 성곽 밖으로 여행을 두려워한 나머지 4면을 활용한 3D 입체 영상과 가상 감각을 통한 여행 프로그램에 탐닉할 것이다. 종교는 유지될 것이다. 정치는 경제와 통합될 것이다. 이 도시는 최소한 100여년간은 더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지만, 결국 성곽 외에서 태어난 돌연변이체에 의해 파괴될 것이다. 도시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대인 무기 개발에는 심혈을 기울일 것이나, 세계 정복따위는 더 이상 의미가 없으므로 전쟁 무기 개발에는 소홀할 것이다. 외계인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하기에는 ‘인류’라는 유대성이 희미해져 있을 것이다. 사업성이 떨어지는 다른 별로의 이주는 더 이상 꿈꾸지 않을 것이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 탓에 공상이 멈췄다. 걸어온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붉고 푸른 빛이 아주 멀리서 깜박거리는 것이 보였다. 사고가 난 것일까. 누군가 잡혀 가는 것일까. 잡혀 가는 것은 두 여자 도인일까, 다투던 이성애자 커플일까, 편의점의 호기심 많은 일행들일까, 아니면 불온한 디스토피아를 상상하던 자일까. 사이렌 소리가 멎고, 불빛은 60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진 채 깜박이다가 곧 꺼졌다. 정적. 갑자기 공간은 말을 잃었다. 허나 이내 인공의 소리가 사라진 공간에 우주음이 들어찼다. 우우웅하는 소리였다. 행성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 지구가 자전을 하는 소리. 달이 공전을 하는 소리. 태양광선이 지구로 날아오는 소리. 우리 은하가 나선형의 팔을 휘두르는 소리. 그런 소리였다. 갑작스레 들려온 우주음에 멍해졌지만 곧 풀벌레의 울음 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명이었을까.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게 진짜 세상의 소리일까. 이 소리는 진실일까. 문득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아주 먼 과거를 떠올려보았다. 공룡이 태어나기 이전, 아메바가 태고의 바닷 속을 헤엄치기 이전, 지구가 불과 끈적한 대지로 들끓기 이전, 우주의 먼지들이 별을 이루기 이전, 엄청난 팽창과 엄청난 폭발이 이루어지기 이전.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여름밤의 공기가 기도를 지나 몸 속으로 들어차는 것을 느꼈다. 어떤 철학자가 인간의 신체는 입에서 항문까지 열린구조로 되어 있다고 강의하는 것을 유투브에서 본 적이 있다. 체내라는 것은 상상의 공간이었다. 안과 밖, 겉과 속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었다. 인간은 지구 속에 있는가, 지구 겉에 있는가. 지구가 공전을 할 때 태평양이나 지중해가 지구 밖으로 쏟아지는 장면을 상상했다. 장관이었다. 카누를 타고 그 폭포의 끝자락에 놓여 있어보고 싶다. 강물의 일부분이 노랗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올려다보니 구름에 가려져 있던 보름달이 환히 드러나 있었다. 물결들이 일제히 달빛을 건드리며 지나갔다. 강물에 투영된 달빛을 짝을 잃은 토끼처럼 오래 들여다보았다.



2013. 2. 2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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