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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무의미한 밤 7(완결)

멀고느린구름 2013. 3. 3. 22:45



  상우의 목소리가 페이드 아웃되면서 카오디오도 함께 꺼져버렸다. 다행히 시동은 걸려 있는 상태였다. 언제 또 무슨 문제가 발생할 지 알 수 없는 차였다. 클러치에서 발을 천천히 떼고 들어왔던 곳으로 차를 몰아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들어왔던 곳으로는 나갈 수가 없는 구조였다. 차들이 계속 대로 쪽에서 한강 공원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출구를 찾아야 했다. 차를 돌려 반대편으로 가보았다. 디스토피아를 그려보았던 곳까지 이르렀지만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걸을 때는 흔하게 보였던 것 같은 안내지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면서 정유소를 본 기억은 없었다. 난감했다. 주변을 좀 더 잘 살펴보려고 내려놓았던 차창으로 차 뒤편에서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점점 다가오고 있고, 두 사람이다. 사이드 미러로 살펴보았다.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잠시 망설이다 기어를 중립에 두고 운적석 문을 열어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곳 지리를 꿰고 있을 것이었다. 죄송한데요, 여기 출구가 어디죠. 목소리에서 조금 긴장감이 묻어났다. 두 도인은 아무렇지도 손가락으로 아까 갔던 입구 쪽을 가리켰다. 아니요, 입구 말고요, 출구요. 미모의 20대 여성 쪽은 무척 성가시다는 듯이 옆에 있는 동료의 팔을 검지 손가락으로 찌르고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좀 더 나이가 들어보이는 여성 쪽이 건조하게 답했다. 더 아래로 내려가면 있어요, 한 100미터쯤? 아,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70도 이상 숙여 인사를 하고 재빠르게 차에 올라탔다. 형편없는 그들의 기억력이 고마웠다. 두 도인은 또 다른 손님을 찾아 더 멀리까지 걸어가버렸다. 과연 알려준 대로 100미터쯤 더 내려가자 출구가 나왔다. 꽈베기 모양의 고가 교차로를 통과하자 북쪽으로 가는 차선에 오를 수 있었다. 


  카오디오가 고장 난 탓에 들을 수 있는 것은 하이웨이를 질주하는 차들의 주행음뿐이었다. 모든 소리들이 속력에 휘감겨 마모되었다. 조금 더 범주를 넓히면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열어놓은 운전석과 보조석의 창으로 시속 90킬로미터의 바람이 쏟아져들었다. 오래전 좋아했던 <접속>이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전도연이 맡은 수현이라는 인물은 외로움이 깊어지면 심야의 드라이브를 즐겼다. 수현이 차창을 열고 귀엽게 파마한 머리를 흩날리며 밤 속을 달릴 때면 벨벳언더그라운드의 노래가 나왔다. 패일 블루 아이즈. 카오디오를 켜놓은 것처럼 귓가에 루 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벳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은 그 자체가 뉴욕이었다. 외로운 미드나잇의 뉴요커를 동경했던 젊은 예술가들은 그런 방식으로 영화 속의 수현과 동현을 뉴요커처럼 묘사했다. 고교 시절에 그 영화를 본 나 역시 야경과 드라이브, 고독으로 대변되는 도회지의 삶을 동경했다. 그리고 지금 꼭 그와 같은 장면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람은 점점 차가워졌다. 차창을 모두 올리고 히터를 켰다. 주행음들은 잦아들었고 차 안에 조금씩 온기가 돌았다. 그제서야 울기 시작했다.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다. 짐승처럼 괴성을 질렀다. 그럼에도 침착하게 운전을 하고 있는 것이 서러워서 더 울었다. 울음은 소나기처럼 그쳤다. 붉어진 눈시울과 눈가의 물기만이 울음의 시간을 증언했다. 빙하기와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귀소본능에만 의지한 채로 파주에 돌아왔다.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는 미분양 아파트 단지들을 건성으로 지나 살고 있는 낡은 빌라촌으로 돌아왔다. 차를 주차장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채로 라동 203호를 향해 걸었다. 문 앞에 서서 자정에 도착했던 문자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영준이가 자살했단다. 내일 시간 되면 좀 내려와라.' 짧은 두 줄의 문장이 일으킨 소용돌이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되고 있었다. 삭제 버튼을 눌렀다. 그대로였다. 한 번 더 누르고 싶었다. 이미 삭제할 수 있는 메시지가 없었다.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한 번 더 삭제하고 싶었다. 철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 시계를 보았다. 두 시간 후면 출근시간이었다. 잠은 자지 않기로 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베란다 쪽으로 나갔다. 아래 쪽에 공터를 거니는 젋은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열대야로 인해 사람들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2013. 3. 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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