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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무의미한 밤 4

멀고느린구름 2013. 2. 25. 08:35




  도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옮겨 가서는 근처 벤치에 앉았다. 여름밤이 내는 소리를 듣기 위해 음악을 껐다. 이어폰을 채 빼기 전부터 물결 소리며, 풀벌레 울음 소리며, 여름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이 내는 소리를 듣기 위해 수 십년 동안 바위에 앉아 밤하늘에 귀를 기울였다는 사람을 티비에서 본 적이 있었다. 잔 물결 위에 도시의 불빛들이 엎질러져 강물을 이색적으로 물들였다. 강물 아래에는 물고기들이 살고 있을까. 영화 <괴물>의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 영화배우 배두나를 무척 좋아했었던 때가 떠올렸다. 물결의 부침에는 리듬이 있었다. 떠오르고 가라앉고 떠오르고 떠오르고 가라앉고 가라앉고 떠오르고 가라앉고 떠오르고 떠오르고 가라앉고 가라앉고 떠오르고. 그런 식이었다. 가져온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요조라는 가수는 <인간실격>의 주인공 오바 요조에게서 이름을 따왔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성이라는 그 가수의 특성에 따라 ‘요조숙녀’에서 이름을 따왔으리라고 오해했다. 이름을 ‘오바’라고 하는 것도 곤란했을 것이고,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오바 요조’라고 했어도 왜색이 짙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한참을 멍하니 강물의 흐름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짝!’하는 소리가 들려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왼쪽, 두 칸 정도 건너편에 있는 벤치에서 난 소리였다. 언제 왔는지 두 쌍의 남녀가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여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울고 있는 것을 보니 따귀를 때린 것은 남자 쪽이었다. 남자 쪽이 언성을 높였다. 미쳤어? 미쳤냐고! 하는 소리가 온 천지에 다 퍼졌다. 남자는 성악가 혹은 락커라도 되는 것일까. 그래! 미쳤다 미쳤어!! 여자 쪽이 반격에 나섰다.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둘은 서로를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어떻게 될까. 저절로 돌아간 고개를 제자리로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물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짝! 여자 쪽에서 남자의 뺨을 때렸다. 후려쳤다고 하는 편이 더 옳겠다. 남자는 마치 전혀 공격 당하지 않은 사람처럼 미동이 없었다. 잠시 후 남자가 조용히 무어라 중얼거리자 여자가 한 번 더 뺨을 후려쳤다. 엉덩이가 들썩였다. 남자의 메시지를 듣고 싶었다. 남자가 일어서려고 하자 여자가 남자의 손을 붙잡고 끌어내렸다. 격정적인 키스라도 이어질까 싶었는데, 여자가 다시 남자의 뺨을 후려쳤다. 멀리서도 남자가 굉장한 격정을 인내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여자는 전혀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일어나야 할까. 엉덩이가 벤치에서 떨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거짓말처럼 두 남녀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황급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고, 동시에 발을 내딛어 반대편으로 걸었다. 곧 다시 한 번 짝! 하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미안하다고 낮게 읊조렸다. 이번에는 분명히 들렸다. 하지만 곧 또 한 번 짝! 소리가 났다. 이렇게 되자 처음 번에 난 짝 소리도 여자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튼 어딘가 정상적인 커플은 아니라고 여겨졌다. 걷기 시작한 김에 멀리까지 걸었다.  


  거친 광경을 보아서 그런지 갑자기 허기가 졌다. 마침 가까이 편의점 건물이 보였으므로 그리고 걸어갔다. 건물 내부에서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빅뱅의 목소리였다. 곡명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알바생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전주비빔밥맛 삼각김밥과 육개장 사발면을 사서 밖의 테이블 쪽으로 나왔다. 새벽 2시경이라는 시간대가 무색하게 여닐곱 명의 사람들이 각기 무리를 지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장 구석에 자리한 테이블로 가 앉았다. 라면이 익는 동안 삼각김밥을 먼저 먹었다. 남자 둘에 여자 둘이 앉은 테이블 쪽에서 이쪽을 흘깃거리며 수런댔다. 새벽 두 시에 한강의 편의점에 나와 혼자 전주비빔밥맛 삼각김밥을 먹는 남자는 역시 수상 쩍은 것이었다. 더군다나 삼각김밥의 남자는 검정 세미정장 차림이었다. 스티커 문신이라도 하고 나왔으면 더 좋았으리라. 남자 둘 여자 둘은 이쪽의 신원에 대해 자기들끼리 여러가지 추리를 해보는지 연신 키득거렸다. 아무튼 진실은 알려지지 않을 것이기에 상관 없었다. 컵라면이 다 익었다. 하지만 어쩐지 먹고 싶지 않았다. 배가 불렀다. 구겨진 포장비닐을 펴서 전주비빔밥 삼각김밥의 칼로리량을 확인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컵라면 쪽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생산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한 해 불필요하게 생산되고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의 양은 전 세계의 기아를 다 해결하고도 남을 분량이었다. 중학교 때 배웠던가. 윤동주의 싯구가 떠올랐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서글퍼했다? 괴로와했다? 서글퍼했다인지 괴로와했다인지 헛갈렸다. 남자 둘 여자 둘에게 가서 물어볼까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어쩐지 잘 알지도 못할 것 같기도 했고, 뭐랄까 화룡점정을 찍어주는 것 같기도 한 것이었다. 새벽 두 시, 검은 세미 정장 차림의 남자, 전주비빔밥맛 삼각김밥을 혼자 먹고 있다, 컵라면은 먹지 않고 이상하게 노려보고 있다. 그리고 최후에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와 윤동주의 싯구 끝이 서글퍼했다인지 괴로와했다인지를 물어본다. 컵라면을 자리에 두고 일어나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물론 컵라면 속에 소형 폭파장치 같은 것은 설치하지 않았다. 



2013. 2. 2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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