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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달에서 2

멀고느린구름 2011. 12. 23. 20:45




2



그래서 말인데, K의 목소리가 진지하다. 응.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우리 서로 정리해야할 것들을 정리하자구, K는 정해진 대본을 읊듯이 말한다. 분명 몇 번이고 되뇌어본 말일 것이라 여기니 피식 웃음이 난다. 너도 참 이럴 때 웃음이 나와? 그래도 우리 사귄 게 자그마치 7년이었다고, K는 당황한 표정이다. 응, 그 7년이 이렇게 기묘한 곳에서 끝이 난다니 웃음이 나오네. 라고 얼버무리고 만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정리한다는 말일까. 7년의 세월을, 그 속에 깃든 갖가지 사연들을, 함께 갔던 장소와 함께 듣던 노래, 그동안 우리가 먹었던 음식의 품목들을 어떤 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말일까. 사람은 컴퓨터가 아니다. 포맷이 불가능하다. 바탕화면에 있던 것을 폴더의 폴더, 그 폴더의 폴더 속쯤으로 숨겨두는 것만이 최선이다. 그러나 K는 계속 무언가를 정리하자고 한다. 무엇을. 어떻게. 위자료라도 줄 셈인 걸까. 그런 것보다는 이 마지막 순간의 풍경을 K의 마지막 목소리를, 숨결을 나는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K를 만난 것이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걷는다. K는 어쩔 줄을 몰라하다 종내 침착해진다. 그도 무언가를 느낀 걸까. 그렇기를 기대할 뿐.  


응? 저건 뭐지. K가 가리키는 쪽을 본다. 사람의 실루엣이다. 사람 같은데, 나는 공포를 느끼며 말한다. 역시 가장 무서운 건 사람이다. 잠깐 여기 있어, K가 나를 세워두고 앞으로 나선다. 그의 이런 점이 좋았다. 그는 늘 두려움에 맞서고자 노력했다. 물러서고 뒤돌아가는 법이 없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이다. K는 실루엣 옆으로 조심스레 다가가서 그것과 무언가 말을 주고 받는다. 이내 내게 오라는 손짓을 한다. 구두를 다시 갖춰 신고 K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이 분도 여기서 길을 잃었대, 뭐라고 해야하나 그러니까… 이 분도 지구인이야. 라고 K는 담담하게 소개한다. 하지만 담담해질 수 없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우리는 거의 동시에 묻는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란 Y와 나다. Y는 고등학생 시절 나와 같은 써클에 있던 남자애였다. 세상에, 넌 하나도 안 변했구나, Y가 말한다. 너야말로,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Y는 정말 고등학생 시절의 모습 그대로다. 에? 둘이 아는 사이야? K는 흥미롭다는 얼굴이다. 물론 일말의 경계심도 함께 담긴 얼굴이다. 응, 고등학교 때 음악감상부를 같이 했었어. 왜 내가 예전에 말했지? Y라고. 나는 최대한 담백하게 말하려고 애를 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아아, 그 Y, 그 Y가 이분이구나, 하하 그 Y라면 잘 알지, 그 Y구나, K는 그를 정말 잘 아는 듯이 반가워한다. 내 기억으로 그에게 Y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7년의 세월 중 10분도 채 되지 않았을 텐데도. K와 Y는 어색하게 악수를 한다. Y에게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묻자 Y는 근처에 앉아서 얘기할만한 까페가 있다고 안내한다. 달의 뒷편에 까페가 있다니. 못 본 사이에 Y의 농담이 늘었다고 여긴다. 하지만 달의 뒷편에 온 것 자체가 기묘한 일이니 못 믿을 것도 없다 싶어 나와 K는 Y의 뒤를 순순히 따른다.     

         

놀랍게도 까페는 정말 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우리는 달의 황무지 한 켠에 세워진 까페의 문 앞에 선다. 프로방스 풍의 조그만 까페다. ‘별의 강 간이역’이라는 간판까지 붙어 있다. 내가 자주오는 까페지, 카페라떼가 일품이야, Y는 친절한 설명을 곁들인다. 우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까페 안에는 더욱 놀랍게도 몇몇의 사람들이 앉아서 커피 잔을 앞에 두고 떠들고 있다. 하늘색에 가까운 옅은 파스텔블루 빛의 내부는 아늑하다. 세 사람이요, Y가 오디오 앞에서 CD를 바꾸고 있는 점원에게 말한다. 오, 오늘은 친구들이 왔네. 점원은 화사하게 웃으며 우리를 창가쪽 테이블로 안내한다. 창밖은 역시 달이다. 점원은 우리를 안내하고 제자리로 들어가더니 CD를 바꿔서 음악을 켠다. 카펜터즈다. Y와 내가 음악감상부였던 시절 자주 듣던 것. 점장님이 나랑 취향이 비슷해, Y가 생긋 웃으며 말한다. 나와 K는 그저 모든 게 어리둥절할 뿐이다. K, 이런 것에 대해서는 그 책에 쓰여진 바가 없어? 내 질문에 K는 그제서야 주섬주섬 책을 펼쳐본다. K도 적잖이 당황한 게 틀림없다. 아, 지금 상황에 대해서는 내가 말해주는 게 좀 더 빠를 것 같은데요. 괜찮다면 제가 말씀드릴까요? Y가 책장을 분주히 넘기는 K를 향해 말한다. 나와 K는 서로를 한 번 쳐다보고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먼저 말씀드리자면 여기는 달의 뒷편이에요. Y가 말한다. ‘그런 건 이미 알고 있고’ 라고 K의 표정이 말하고 있다. 아, 물론 그건 아시겠지요. Y는 독심술이 가능한 걸까. 그가 말을 잇는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곳은 영혼들의 세계입니다. 엄밀하게는 죽은 사람들이 오는 곳이지요. 하지만 간혹 죽지 않았지만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루트는 여러가지가 알려져 있어요. 가끔 오랜 수련을 한 수도승이 명상을 하던 도중 오기도 하고, 큰 충격을 받고 기절한 사람이라든지, 식물인간이 된 사람이 오기도 해요, 또 지구 상에 감춰진 어떤 비밀스런 장소를 통해 워프해오기도 하고요. 그리고 두 사람처럼 개기월식의 시간에 워프되기도 하죠. 이곳은 정신의 세계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실제가 되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달이라는 공간을 빌려 쓰고 있는 것뿐이지요. 이 까페나 저, 그리고 여러분조차도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달에서는 실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주왕복선을 타고 달에 도착해서는 우리들을 볼 수 없죠. 여러분이 지구로 돌아가서 달의 뒷편에는 사람들이 살고 끝내주는 까페라떼를 파는 까페가 존재한다고 주장해도 절대로 증명할 수가 없어요. 정신병원에 입원할 것은 권유당할 뿐이겠죠. 이 까페는 까페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영혼들의 사념과 까페 점장을 하고 싶었던 저기 저 분의 사념이 만들어낸 꿈의 공간이에요. 근사하죠? 


우리가 넋이 나가 있는 사이 - 더 나갈 넋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 까페라떼가 우리들 앞에 놓인다. 드셔보세요, 끝내준답니다. Y의 권유에 우리는 순한 양처럼 동시에 잔을 든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따뜻하다. 놀란 가슴이 조금 누그러지는 듯하다. 그렇군요, K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믿기 어렵지만 믿을 수밖에 없겠네요. 아무튼 여기는 달의 뒷편이라고 생각되니까요.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1시간하고 조금 뒤면 다시 지구로 돌아갈 테고, 여기서의 일들은 꿈을 꾼 것이라고 여겨도 무방하겠죠. K는 퉁명스럽다. 그렇겠죠. Y는 어딘가 서운한 눈치다. 나로 말하자면 Y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지만 묻지 못하고 있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저기 Y, 우리 부선생님 기억해? 카펜터즈의 노래는 고향 같은 거다라고 맨날 그랬잖아. L선생님 말이지, 문학샘이었지 아마. 맞아맞아, 문학이었어, 문학 선생님이 왜 문예부를 안 맡고 음악감상부 같은 걸 하냐고 우리가 물었지, 그때 첫 면접 때 말야. 그래그래 그랬어, 기억 나 나도, 좀 웃겼지. 응, 되게 웃겼어, 선생님은 지금 뭐하고 계실까. 그러게, 나도 궁금하다. 그 시절, 참 좋았어, 그치. 응, 좋았어, 음악감상부가 처음에는 1년을 못 갈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우리가 졸업할 때까지 버텼어, 물론 우리가 졸업하고 다음 해에 바로 없어져 버렸지만. 그게 다 네 덕분이지 뭐, 전교 1등 학생회장이 있는 부를 학교에서도 쉽사리 없애진 못한 거지, 중간에 위기가 있었을 때 네가 딜을 하기도 했었잖아 왜, 부를 없애면 S대따위 가지 않겠다고. 응, 뭐 1년에 S대를 1명 배출하는 학교였으니까, 플래카드를 걸지 못하게 되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겠지, 생각해보면 나도 학교도 참 우스운 짓을 한 거야. 덕분에 난 무임승차로 1년 더 행복했지 뭐, 쉬는 시간에 우리 부에 소파에 누워서 음악 듣는 게 낙이었으니까, 거긴 정말 지상낙원이었어, 안 그래. 응, 낙원이었지, 사실 말야, 난 요즘에도 종종 그곳에 가서 음악을 들어. 에, 정말, 그게 가능해. 여긴 영혼들의 세계라고 했잖아, 마음 속으로 강렬하게 떠올리면 어떤 공간이든지 만들 수 있어, 가보고 싶니. 응, 하지만...


이라고 한 뒤 K를 돌아본다. K는 혼자 팔장을 낀채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와 Y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K가 조용히 한 마디 내뱉는다. 외롭구만.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Y와 얘기하는 내 마음은 절박하다. K는 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네가 어째서 여고생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이제 알겠어, 난 어차피 곧 옛 애인이 될 사람이니깐 이 자리에서 피해주는 게 좋겠네, 그럼 둘이 즐겁게 얘기하고, 우리는 1시간 정도 뒤에 지구에서 다시 보자고. K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음이 복잡하다.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을까. 다음은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내 눈치를 살피는 K에게 내가 한 말이다. 지구로 돌아가지 않을래, 난. 


2011. 12. 2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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