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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달에서 3

멀고느린구름 2011. 12. 26. 22:29



3



K의 표정은 월드컵 결승전 후반 마지막 1분, 1대 1 상황에서 자살골을 넣은 에이스 스트라이커 같다. 절망과 공포. 뭐라고? K의 반문. 가지 않겠다고, 나의 응답. 다시 뭐라고? K. 안 가! 나. 조금 전까지 카렌 카펜터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흐르던 까페가 아니다. 음악은 멎고, 테이블도 커피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곳곳에 잿빛 크레이터가 드러나보이는 달의 표면 위다. K와 나, 그리고 Y가 있다. 


미쳤어? K의 말이 거칠어진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 대신 Y에게 ‘미안해'라고 사과한다. 지금 뭐하는 거야?!  K의 목소리는 내 심장을 찢을 듯 솟구쳐 온다. 머리가 어지럽다. 두 사람이 먼저 얘기를 해야할 것 같네, 난 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Y는 텅빈 공간에 우뚝 서 있는 파란 문을 가리킨다. 100미터 정도 거리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너도 네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어, 네가 원한다면 함께 가자, 난 저기서 기다릴게, Y는 내 왼쪽 어깨를 한 번 토닥이고는 문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따라가고 싶다. K가 내 양 어깨를 움켜쥔다. 


정신차려, 넌 귀신한테 홀린 거야. K의 말에 욱하는 감정이 솟구친다. 귀신이라고! 아니야! Y가 왜 귀신야! 니가 어떻게 그걸 알아! 어떻게 알길래 그렇게 함부로 말을 해! 넌 이제 나한테 아무 것도 아니잖아!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K의 손을 떨쳐낸다. K는 더 이상 말이 없다. 우리들 사이에 기묘한 달의 침묵이 흐른다. 어째서일까 그 침묵은 마치 울음처럼 느껴진다. 개기월식이 끝나기까지 이제 얼마나 남은 걸까. 이곳에 남으려면 서둘러 Y가 기다리는 파란 문으로 옮겨 가야한다.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7년을 만났지만 행복하지 못했어, 지금 네 모습이 그 증거일 거야, K가 담담히 침묵을 흩뜨린다. 아니야, 행복했어. 나는 중얼거리듯 말한다. 이별 앞에서 느끼는 불안감일 뿐이야, K는 언제나 나를 가르치려고 들었다. 아니야, 행복했어. 나는 주문을 외듯 말한다. 내가 널 이렇게 잡는 건… 너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들어서는 아니야, 여전히 난 자신이 없고, 너와 내가 이 이상 더 어떤 발전이 있으리라고 기대가 안 돼,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죽으러 가는 걸 둘 수는 없어, 정신차리고 생각해, 저긴 산 사람이 가는 데가 아냐, 행복한 시절이라고… 웃기는 얘기야, 저걸 지금 행복이라고 여기는 건 우리가 만난 7년이 불행했기 때문이야, 우리가 행복했다면, 저걸 네가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네가 지금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K가 말이 많아지는 순간이 늘 싫었다. 아니야, 행복했어. 나는 기도하듯 말한다. 


K는 표면 위에 주저앉아 버린다. 시계를 본다. 30분이야, 30분이 남았어, 이리로 와, 내 옆에 와서 너도 앉아, 함께 돌아가는 거야, 그리고 헤어지는 거야 우리는. 나를 올려다보는 K의 눈동자가 투명하다. 진실한 눈동자다. 나는 그가 거짓말으로라도 다시 한 번 더 만나보자고 말해주길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그 거짓으로 인해 망설임 없이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너무나 진실해서 나는 지구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다. 진실은 두렵고 벅차다. 어린 시절 창가에 서서 올려다본 달은 아름다웠다. 그 선한 노랑의 빛이 마음의 죄를 씻어주곤 했다. 몇 천 년전의 사람들은 달의 빛은 죽은 영혼들이 올라가서 내는 빛이라 여겼다. 전설은 낭만적이고 따뜻했다. 그러나 별의 상처가 가득한 이 곳에서 만난 죽은 영혼은 서글펐다. 따뜻하지 않았다. 나는 Y에게 묻고 싶었다. 너는 죽은 거냐고. 나는 Y에게 말하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너를 기억하지 못했다고.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잊혀진다. K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날에는 이렇게 나를 잡지도 않을 것이고,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행복하게 웃으며 달의 까페 문을 열지도 모른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그런 인생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200년이 지나고, 1000년이 지나면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호모 사피엔스나,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같은 종으로 통칭될 것이고,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된 나의 유골이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박물관에 전시될 것이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못하는 인생은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없다. 없다. 없다. 나는 속으로 자꾸만 되뇌인다. K는 더 말이 없고, 시간은 차츰 흐른다. Y가 기다리는 파란 문으로 고개를 돌린다. 


2011. 12. 26.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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