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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달에서 1

멀고느린구름 2011. 12. 22. 09:15



달에서






   우리가 와 있는 곳은 달의 뒷편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처음 그 자리 그대로였다. 우리는 분명히 대학로 뒷편의 낙산공원 벤치에 앉아 개기월식을 보고 있었다. 11년마다 찾아온다는 개기월식이었다. 우리가 만난 지는 꼭 7년이었다.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완전히 덮어버렸을 때였다. 눈 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모든 것이 선명해졌을 때는 이곳이었다. 장소가 뒤바뀐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K는 감청색 스웨터에 검은 코트를 걸치고 붉은 털실로 짠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등에는 항상 짊어지고 다니던 통기타 가방 - 그는 그것을 악기를 담는 용도보다는 정말 가방처럼 이용했다. - 이 메어져 있다. 나 역시 늘 입고 다니던 붉은 빛 겨울 코트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애용하던 피아노 건반 무늬의 가방 - 2년전, <노다메 칸타빌레 애장판>을 샀다가 당첨된 상품- 이 들려져 있다. 


춥군, 이라고 K가 말한다. 나는 분명히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소리의 형태를 띤 것은 아니었다. 외부에서 무엇에 의해 전달되어져 온다기 보다는 내 속 어딘가에서 밀려올라오는 것이었다. 내 말이 들려? 라고 묻는다. 응, 이라고 K는 짧게 답한다. 여기가 달의 뒷편인 걸 어떻게 알지. K는 메고 있던 기타 가방을 내려놓고 주섬주섬 가방 속을 뒤지기 시작한다. 곧 책 한 권을 내 앞에 내미는 것이다. 에반. T. 니이하트, <이클립스에 이끌린 자들>. 중고서점 구석 책장 가장 아래 칸에서 찾아낸 듯한 책이다. 이래뵈도 양장본이야. K는 우쭐해져서는 말한다. 이 상황에서도 이런 것에 우쭐해지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K다. 가짜는 아니다. 안심이다. K는 붉은 색 커버를 열어 몇 페이지인가를 넘기더니 한 구절에 손가락을 댄다. 


‘이클립스에 이끌린 자들은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지구의 그림자가 완전히 달을 가리는 순간, 칠흑 같은 어둠을 경험하고 갑자기 영혼들의 세계로 순간이동 되었다는 사람들을 나는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혹은 미국. 또는 중국. 심지어 아프리카의 콩고나 인도네시아의 무명 섬에서도. 그들은 하나 같이 그곳을 ‘달의 뒷편'이라고 지칭했다. 어째서인지 그것만은 일관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모습이 지구에서 떠나기 전의 모습이 아닌, 그들 자신이 가장 행복했다고 여기는 시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어디가 달라졌어? 내가 물었다. 좀 더 예뻐진 것 같아, K가 답했다.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는 없어? 라고 쏘아붙였다. K는 능청스럽게 미소 지으며 다시 이윽이 나를 바라본다. 갈빛 눈동자의 잔잔한 움직임. 적어도 그는 그대로다. 확실히 다른데, 라고 K는 말한다. 어디가? 라고 되묻자. 어디가 어떻게 라고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여고생 같은 느낌이라는 거야. K는 거울을 꺼내 한 번 보라고 권한다. 나는 가방을 뒤져 손거울을 꺼낸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K가 선물한 것이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힉! 나는 거울 놓쳐버린다. 왜 그래? K가 거울을 주워들며 묻는다. 내가 보이지 않아. 무슨 말이야? K도 거울을 들여다본다. 힉! 진짜네. K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본다. 어쩌지, 우리 벤치에 앉아 있다가 교통사고라도 당해버린 걸까? 진심어린 걱정의 말이었다. 별에서 떨어진 은하철도 999가 우리를 치어버리고 달아났다고 생각하면 가능하지. K가 피식 웃고 만다. 농담할 때가 아냐, 나는 소리친다. 농담이 아냐, 진담이라고. K가 말한다. 전혀 도움이 안 되는군 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K의 손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싼다. 따뜻하다. 걱정하지마. K의 말에 거짓말 같이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은하철도 999에 뺑소니를 당해 죽었다고 해도 괜찮지 않은가…. 여길 보라고, K는 손가락으로 책의 한 구절을 다시 가리켰다. 


‘달의 뒷편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이클립스가 끝나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클립스의 시간이 끝나면 그들은 대부분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2시간 뒤야, K가 생글거린다. 휴….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평소라면 이런 출처가 불분명한 책을 믿을 수 있을까 하고 의심했겠지만 지금에서는 아무래도 좋다. 마음이 놓이자 아까의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고 싶었다. 저기 근데, 나 정말 여고생 같아졌어? 응, 정말이야.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하얗고 예뻐. 내 여고생 시절이 어떠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난 어째서 여고생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간 걸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모습이라…. 잠깐 여길 봐봐, K가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로 또 한 구절을 가리켰다. 


‘하지만 탈출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영혼은 그곳에 갇혀 돌아오지 못했고, 현실에서 그들의 육신은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다. 불행한 것은 그들이 어째서 돌아오지 못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뭐야 이거, K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돌아가지 못할 확률이 얼마나 된다는 거야? 내 말에는 불안이 가득 스며 있다. 1%라는데. 안심해야 되는 거야?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뭔가 100%로 만들기 위한 방법 같은 건 안 써 있어? K의 답은 단호하다. 없어. 


  우리는 무작정 2시간 후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남는데 좀 둘러볼까? 느긋한 K를 심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K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이제서야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잿빛 대지 곳곳에 달의 크레이터가 있다. 별에 부딪친 상처들이다. 우리는 그 상처 위를 밟으며 걷는다. 여고생 때 무슨 일이 있었어? 대뜸 K가 묻는다. 무슨 일이라니? 의아하다. 그렇잖아,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여고생 시절이라니. 궁금해. 몇 학년 때인 거지? K는 정말 궁금한 눈치다. 정말 여고생이 맞긴 맞아? 되묻는다. 확실해, 분명하다구. K는 또 단호해진다. 흐음…. 나는 여고생 시절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곱씹어본다. 행복했던 일이라고 한다면 역시 ‘그의 일’이다. 허나 그의 일을 K에게 말할 수는 없다. 글쎄, 라고 얼버무리고 만다. 칫! K는 낙담한다. 한동안 말없이 걷는다. 달에서의 시간이 지구에서의 시간과 같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친다. 그렇다면 너무 아까운 시간이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구두를 벗었다. 맨발로 다시 걷는다. 달 표면의 찬 기운이 그대로 발바닥에 전해진다. 그닥 시리지 않다. 외려 보드랍다. 곧 K도 따라한다. 우리는 한 손에는 구두를 들고, 한 손으로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걷는다. 차갑고 보드랍고 따뜻하다. 


저기, 우리가 오늘 왜 만났는지 기억하지? 이번에도 침묵을 깬 것은 K다. 응, 기억상실증에 걸리진 않은 것 같아. 내 말에 K가 살풋 웃었다. 나도 따라 웃고 만다. 우리는 오늘 헤어지기 위해 만난 참이었다. 7년은 긴 세월이었다. 또 7년은 꼭 긴 세월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스물 셋에 만났으니 20대의 대부분을 꼬박 함께 지낸 셈이다. K와 헤어진다는 것은 그 세월과의 이별을 뜻했다. 달에서의 밤하늘 -우리는 분명 밤에 워프했으니까.- 에 지구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지구의 그림자도 채 덮지 못했을 달의 뒷편에 와 있었다.   




2011. 12. 2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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