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미남풍의 강아지 꽃미남풍의 강아지였어.남동풍은 아니고?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내가 던지는 말은 모조리 안타를 맞고 튕겨져 나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외야로 날아가버린 ‘꽃미남풍의 강아지’를 쓸쓸히 안고 돌아와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두 팔과 교차로 팔짱을 낀 채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었다. 내 도전이 무모한 측면도 분명 있었다. 이런 와중에 대체 꽃미남풍의 강아지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물론 분위기 파악 못하는 장난질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말야... 잠깐만 열을 식힐 겸해서 좀 들어봐주면 안 될까, 꽃미남풍의 강아지에 대해서 말이야.뭐?! 그녀는 진심으로 황당해했다. 눈동자 속에는 얼핏 후회의 빛도 어렸다. 대체 뭐 이따위 남자를 사랑한다고 만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 하는 거 이제 지긋지긋해! 여인 1이 여인 2를 향해 외쳤다. 까페에 앉은 사람 중 누구라도 그녀들이 앉은 자리를 돌아봤을 법한 크기의 목소리였다. 다만, 지금은 그녀들 외에는 나밖에 손님이 없었다. 아무튼 한 번 자기 이야기를 들어봐달라는 신호인 것 같아서 귀를 기울였다. 특별히 읽고 있는 신인작가의 소설이 실례가 되기에 두 손 두 발을 못 드는 게 원통할 정도로 재미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아, 그런데 두 손 두 발을 다 들며 상당히 꼴불견인 상태가 되기는 하겠다. 정확히 말해 내 몸매는 팬더과가 아니라 사마귀에 가깝기 때문에 그 광경은 더욱 참혹할 것이 틀림 없었다. 여인들의 대화는 빠르게 이어졌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누군데?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말해질 수 없는 것 바로 이때다. 해는 수평선 아래로 완전히 잠겼다. 뒷 편의 아파트에서 일제히 형광등이 켜졌지만 해변의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남자는 옆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희미한 윤곽만 알아볼 수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지 못했다. 이때가 아니면 영원히 기회는 오지 않겠다는 직감. "나 있잖아..." "어 왜?" 여자의 목소리에 바다가 잔뜩 베어 있다. 쏴아 밀려가는 썰물 소리에 말문이 막힌다. 남자는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더라?" "몰라, 한 10년 됐나." 기억나지 않는 말을 남자는 이어간다. 여자는 남자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일에 관심이 없다. 여자는 무엇에 관심이 있을까...
머리를 자르는 사람 대체 왜 자꾸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거야! 그는 비명을 질렀다. 자고 일어나니 또 머리카락이 자라 있었다. 그의 꿈은 대머리가 되는 것이다. 그는 머리카락이 자라는 게 싫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내었다. 그런데도 쉼없이 머리카락은 자랐다. 부처의 말이 하나 틀린 게 없어, 삶은 고통의 연속이야. 그는 절망하고 절망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으나 20년 동안 기도를 해도 머리카락의 성장이 멈추지 않자 불교로 개종했다) 그가 언제부터 머리카락이 자라는 걸 혐오하기 시작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도 잘 몰랐다. 단지 추측하고 있을 뿐. 아마, 어릴 적에 부모가 이혼했을 때부터였거나, 아니면 가장 좋아하던 장난감을 사촌동생에게 강탈당했을 때, 그것도 아니면 7년간 짝사랑하던 이..
전화가 안 온 날 이 시간이면 그는 항상 전화를 했다. 허나 오늘은 아직이다. 창밖에서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린다. 미안하지만 들어올 수는 없다. 가뜩이나 습기가 가득찬 마음에 더 수분을 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를 만나던 때에도 비가 왔었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내 마음도 날씨 같았다. 불을 모두 꺼둔 방은 별빛을 잃은 우주처럼 서늘하다. 똑딱똑딱. 시간을 미는 초침 소리만이 또렷하다. 저 놈의 초침 소리가 시간을 밀고 있는 탓에 내 마음은 더욱 초조하다. 나는 덮고 있던 이불을 제치고 일어났다. 보이지 않지만 익숙하게 벽시계를 떼어내어 전지를 뽑았다. 그리고 시간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더 이상 누구도 시간을 밀어내지 못했다. 초침 소리가 멈추자 수돗물 소리 같던 빗소리가 갑자기 폭포 소리..
오후만 있던 일요일 내내 비가 온다. 길 위로 엎질러진 네온이 흐른다. 꼭, 밟으면 신발 둘레에 알록달록하니 묻어날 것만 같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거리의 요란한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소리가 볼륨을 줄인다.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다 꽂는다. 이어폰 줄에 매달려 있는 리모컨을 이용해 음악을 켠다. 들국화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 전인권 씨의 슬픔이 끓는 듯한 목소리가 차분한 투로 들려온다. 노래 마디마디에 빗줄기 소리가 새어들어왔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예쁜 비가 내렸네… 생각없이 걷던 길 옆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일요일은 늘 오후만 있는 것 같애. 재현이 말했다. 음, 그런가? 재현이 피식 웃었다. 학교 도서실은 여전히 허술하게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익숙하게 문예부 쪽으로..
보노보노를 만났어 나, 보노보노를 만났어. 캐롤 송 ‘라스트 크리스마스’가 흘러나올 무렵이다.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한다. 원체 엉뚱한 이야기를 잘 꺼내던 그녀라 대수롭지 않게 흘려 듣는다. 그 비버 말이지? 내가 되묻는다. 비버가 아니라, 해달이잖아. 그녀의 왼쪽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기울어진다. 그랬었나? 그랬었나가 아니잖아, 그런 거야, 애초부터 작가가 그렇게 설정한 거잖아. 그녀에게 그런 기묘한 이유로 일일이 화를 내지 말아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하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아무튼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닌가. 그래, 만나서 뭘 했는데.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묻는다. 지금, 뭘 했느냐가 중요해? 그녀는 오늘 밤 나와 대화할 의사가 없는지도 모른다. 뭘 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보노보노를 만났..
그리움의 풍경 비가 개이고 하늘이 멀어졌다. 잠시 푸른 벌에 널어두었던 흰 빨래를 하나 둘 걷어 다시 내 방 한 켠 가시나무 같은 옷 걸이에 걸어두었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빨래를 말리려고 선풍기를 켰다. 여름이 웅웅 울며 제 몸에 남아있던 먼지를 뿜었다. 쓸모없는 기억들, 버려야할 찌꺼기들이 방 안 가득 찼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을씨년스런 가을비의 냄새를 지우려 라디오를 틀어보았다. 치직. 잡음은 몸을 낮춰 방바닥을 흘렀다. 주파수를 살짝 돌리자 곧 익숙한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어느 주파수를 잡던 비슷했다. 창 밖의 멀어진 하늘은 누가 죄다 구름을 걷어 갔는지 시리게 파랬다. 창문을 열었다. 집 근처의 공사장에서 작업하는 소리가 들렸다. 탕탕 위잉. 고단한 소음들. 라디오 속의 가수는 가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