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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말해질 수 없는 것

멀고느린구름 2014. 1. 27. 02:29


© 간지. '욕망의 바다'



말해질 수 없는 것 



  바로 이때다. 해는 수평선 아래로 완전히 잠겼다. 뒷 편의 아파트에서 일제히 형광등이 켜졌지만 해변의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남자는 옆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희미한 윤곽만 알아볼 수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지 못했다.  이때가 아니면 영원히 기회는 오지 않겠다는 직감. 


 "나 있잖아..."

 "어 왜?"


  여자의 목소리에 바다가 잔뜩 베어 있다.  쏴아 밀려가는 썰물 소리에 말문이 막힌다. 남자는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더라?"

 "몰라, 한 10년 됐나."


 기억나지 않는 말을 남자는 이어간다. 여자는 남자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일에 관심이 없다. 여자는 무엇에 관심이 있을까. 여자의 관심사를 생각하자 기억은 더 불분명해진다. 어둠은 해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자의 마음 속에도 어둠은 가득 들어차 아파트의 형광등 따위로는 밝혀지지 않는 것이다. 


 "벨벳언더그라운드의 앨범을 하나 샀어. 표지가 바나나 그림인데, 누가 그린 건 줄 알아?"

 "앤디 워홀."

 "어떻게 알았어?"

 "그냥 알아. 그 음반 프로듀서잖아."

 "아, 그래?"


 벨벳언더그라운드는 대체 남자의 무의식 어디에 잠복해 있던 복병이었을까. 남자는 잘 알지도 못하는 그룹의 이야기를 공연히 꺼내 여자를 더 시큰둥하게 만든다. 여자는 남자보다 벨벳언더그라운드를 더 잘 알고 있지만, 그들에게 흥미는 없다. 설혹 그들에게 흥미가 있다한들 남자는 더 이상 이야기를 진행시킬 이야기가 없다. 이야기가 없는 남자는 여자에게 매력이 없다. 


 "그만 갈까?"


 여자가 말한다. 남자는 반박할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니, 잠깐만 더 있자."


 남자는 스스로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보지만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왜?"


 여자가 묻는다. 남자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바닷물이 다시 밀물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쏴아아. 


 "바다가 돌아오고 있잖아."


 남자는 아닌 밤의 홍두께 같은 말을 해버린다. 허나 뭔가 그럴 듯한 말을 한 것 같아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그런가… 그래. 알았어, 좀 더 있지 뭐."


 여자는 이해하겠다는 말투다. 대체 뭘 이해한 것인지 남자는 전혀 모른다. 남자의 뇌는 이야기를 지어내기 위해 바빠진다. 뇌 속의 공장장은 불같이 화를 내며 노동자들을 닥달한다. 공장장의 욕설이 시작되자, 노동자들은 마지 못해 몇 개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가령 다음과 같은 이야기다. 


 "며칠 전에 내 친구가 결혼을 했는데 말야. 유럽 일주를 다녀왔대. 디에스엘알을 들고 가서 사진을 잔뜩 찍어왔는데, 그거 보니까 한 번 가보고 싶더라."

 "유럽 어디 어딜 갔는대?"

 "어, 그러니까."


 공장장의 폭압에 시달리며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생산성이 뛰어날리 없다. 남자는 재빨리 머릿 속에 떠오르는 유럽스러운 느낌의 나라 이름을 댄다. 


 "머 영국, 프랑스,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그런 곳."

 "아르헨티나랑 볼리비아는 남미 아냐?"

 "어 그런가? 걔들이 언제부터 남미였지…"


 여자는 깊은 한 숨을 몰아쉰다. 여자의 한 숨이 파도소리보다 크다. 남자는 자포자기한다. 다시 달아나는 썰물의 소리를 들으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자기가 가진 자격증의 갯수를 문득 떠올린다. 12개. 남자는 12개의 자격증 소지자다. 남자는 그 많은 자격증 중 스토리텔러 자격증의 부재를 원망한다. 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있다. 여자가 말한다.


 "들리니? 다시 돌아오고 있어…. 우린 여기 못 떠나겠다. 바다가 계속 다시 돌아오니까. 그치?"

 "어? 으응."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여자도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없다. 허나 남자는 여자가 미소짓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남자도 조금 안심하며 웃는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다시 밀려나는 썰물 소리를 들으며 여자가 말한다. 남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뭘?"

 "네가 말하려고 하는 거, 그걸 알겠다고."

 "그래?"

 "응."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게 뭔대?"

 "말해질 수 없는 것."


  검은 바다의 소리가 점점 깊어진다. 아파트의 형광등 불빛이 바다에 둥둥 실려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영국이나 프랑스, 아르헨티나 혹은 볼리비아 같은 나라로. 검은 바다는 조그만 빛을 싣고 수평선 너머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처럼 멀어졌다고 생각하면 돌아와 있고, 돌아왔다고 생각하면 떠나가는 바다였다. 남자와 여자는 가벼운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두 사람이 바라보는 수평선 위로 고기잡이 배 하나가 오래된 불빛을 던지며 지난다. 



2010. 4.1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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