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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전화가 안 온 날

멀고느린구름 2014. 1. 7. 07:32




전화가 안 온 날

 

 

  이 시간이면 그는 항상 전화를 했다. 허나 오늘은 아직이다. 창밖에서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린다. 미안하지만 들어올 수는 없다. 가뜩이나 습기가 가득찬 마음에 더 수분을 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를 만나던 때에도 비가 왔었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내 마음도 날씨 같았다. 불을 모두 꺼둔 방은 별빛을 잃은 우주처럼 서늘하다. 똑딱똑딱. 시간을 미는 초침 소리만이 또렷하다. 저 놈의 초침 소리가 시간을 밀고 있는 탓에 내 마음은 더욱 초조하다. 나는 덮고 있던 이불을 제치고 일어났다. 보이지 않지만 익숙하게 벽시계를 떼어내어 전지를 뽑았다.

 

  그리고 시간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더 이상 누구도 시간을 밀어내지 못했다. 초침 소리가 멈추자 수돗물 소리 같던 빗소리가 갑자기 폭포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한 밤에 술취해 들어온 가장처럼 비는 거세게 창문을 두드렸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행패에 가까웠다. 나는 이불을 왼 손으로 꼭 붙잡은 채 오른 손을 위로 뻗어 바닥을 더듬었다. 휴대폰이 만져졌다. 슬라이드를 밀어 올려보았다. 안 왔다. 그에게서는 문자도 없다. 이런 날이 있었던가 싶다. 철퍽 철퍽, 우르릉 쾅쾅. 술취한 그가 갑자기 나를 찾아와 행패라도 부렸으면 좋겠다. 오늘 같은 날 폭우는 반갑지 않으니 말이다.

 

   이불 속에서 나는 두 허벅지를 서로 비벼본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느껴진다. 마치 그와 꽃잠을 잘 때 같아 몇 번이고 그것을 반복했다. 창문가에서 행패를 부리는 비 소리를 그으며 차 소리가 들려온다. 택시일까 승용차일까. 택시라면 좋겠다. 택시라면 거기에 그가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 허벅지를 비비는 것을 멈추자 그리움이 버스정류장의 승객처럼 우르르 밀려온다. 내게는 그들에게 요금을 징수할 권리가 없었다. 그들은 정복자처럼 무임승차를 한다. 종착역까지 절대 내리지 않을 기세다. 나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문득 그런 생각에 빠진다. 나는 어디까지 인생을 견디며 살아낼 수 있을까. (그는 내게 인생을 즐기며 살라 했지만, 내 생각에 인생은 분명히 견디는 것이다) 이리 가득찬 그리움들을 내리게 하기 위해서는 종착역이 가까운 마을 버스여야 하리라. 그랬다. 나는 아주 어릴적부터 마을버스 같은 삶을 동경했다. 작은 마을에서 적은 사람들을 알고, 소박한 일을 하며, 사소한 취미를 갖고, 소액의 돈을 저축하며 사는 것. 마을 버스로 다 돌아볼 수 있는 세계. 그것만이 내 세상인 그런 삶을 동경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내 비전을 들을 때마다 내 머리를 쓰다듬거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는 광역버스 같은 삶을 원하는 사람이니까.  

 

  슬라이드를 다시 밀어 올려보았다. 바탕화면에 그는 나를 보고 웃고 있지만 나에게 전화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만 화가 나서 바탕화면의 그를 지워버린다. 빈 자리는 기본 바탕으로 들어있는 해바라기 꽃이 대신한다. 화면 속의 해바라기는 몇 해가 지나도 시들지 않고 싱싱한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그와 만나기 전의 그와 헤어졌을 때도, 그리고 그 이전의 그와 헤어졌을 때도 해바라기 꽃은 지금 모습 그대로였다. 어쩌면 사랑은 휴대폰 화면 속의 해바라기 꽃보다 못한 것인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영원불멸한 것을 좋아한다면서도 영원불멸한 것을 잘 견디지 못했다. 내가 바탕화면의 해바라기 꽃을 끊임없이 다른 그들의 미소로 바꾸어야 했듯이.

 

   이성을 잃고 폭주하던 비는 기운이 다했는지 조금은 처연하게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타박타박이는 소리가 너무 안쓰러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살짝 열어준다. 재빠른 빗방울 하나가 이마에 점 하나를 찍는다. 그와 처음 만난 날, 정류장 아래서 비를 긋고 있던 내게 그가 우산을 내밀었을 때도 내 이마에 빗방울이 점을 하나 찍었었다. 마을버스 같은 삶에서든 광역버스 같은 삶에서든 세계는 우연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하나를 확정하려는 순간에 어느 하나는 확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예측했다고 여긴 순간 예측과는 다른 일이 일어난다. 나는 인생에 대해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나는 인생에서 그리고 사랑에서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었다. 배웠다고 한다면 다음 번 인생, 다음 번 사랑에서는 배운 것대로 하면 정답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허나 나는 사람으로부터 생으로부터 100점짜리 성적표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생으로부터도 사랑으로부터도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  

 

   비는 점점 더 잦아들어 나의 검은 방은 진공상태로 변해 갔다. 아무런 소리도 전해져오지 않고, 전해지지도 않았다. 우주복을 잃은 우주비행사처럼 나는 숨이 막혔고, 어둠 속을 부유하며 소리없이 허우적거렸다. 슬라이드를 밀었다가 내렸다가를 몇 차례 반복하다 책 상 위의 시계에 다시 건전지를 넣었다. 똑딱똑딱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아마 더 이상 내게 특별한 전화를 걸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내게 특별한 웃음을 보여주지도 않을 것이다. 허나 그래도 그는 어느 날 우연히 내게 전화를 걸 것이고, 문득 어떤 계기로 그의 웃음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이 생에서는 다시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고, 일어난 것을 내가 알아채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또 다른 그의 전화를 기다릴지도 모르고, 어느 날 갑자기 또 전화가 안 온 날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날에는 또 폭우가 쳤다가 잦아들고, 시계 초침 소리가 싫었다가 사무치게 그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삶으로부터 사랑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고 그저 내리는 비를 이렇게 창문 안 쪽에서 담담히 바라볼 수 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어느 날은 또 모르지. 비오는 거리로 미친 사람처럼 붉게 걸어나갈지도 말이다.

 

2008. 5. 2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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