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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그리움의 풍경

멀고느린구름 2013. 4. 28. 23:17



그리움의 풍경




비가 개이고 하늘이 멀어졌다. 잠시 푸른 벌에 널어두었던 흰 빨래를 하나 둘 걷어 다시 내 방 한 켠 가시나무 같은 옷 걸이에 걸어두었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빨래를 말리려고 선풍기를 켰다. 여름이 웅웅 울며 제 몸에 남아있던 먼지를 뿜었다. 쓸모없는 기억들, 버려야할 찌꺼기들이 방 안 가득 찼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을씨년스런 가을비의 냄새를 지우려 라디오를 틀어보았다. 치직. 잡음은 몸을 낮춰 방바닥을 흘렀다. 주파수를 살짝 돌리자 곧 익숙한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어느 주파수를 잡던 비슷했다. 


창 밖의 멀어진 하늘은 누가 죄다 구름을 걷어 갔는지 시리게 파랬다. 창문을 열었다. 집 근처의 공사장에서 작업하는 소리가 들렸다. 탕탕 위잉. 고단한 소음들. 라디오 속의 가수는 가슴 아프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흰 빨래들도 똑똑 물기를 방바닥에 떨구며 제 하고픈 말을 했다. 외롭고 넓고 까만 방. 그 안에서 나만이 말 없이 앉아서, 동그마니 옛 편지를 읽었다. 


 ‘사는 동안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여기서 ‘절대로’ 와 ‘무엇이든’ 이란 말이 어쩐지 쓸쓸한 느낌을 주었다. 왠지 오히려 쉽게 잊힐 것 같은 쓸쓸함. 진실한 고백은 ‘죽을 때까지 사랑할게’ 가 아닌 ‘사랑해’ 였다. 인간의 마음이란 현재진행형이 가장 솔직한 것이다. 

 

빨래는 쉽게 마르지 않았다. 유행가는 클라이막스를 숨가쁘게 넘더니, 잔잔하게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듯 느린 템포로 바뀐다. 내가 보고 싶다던 그 사람은 지금도 가끔 내가 그리울까. 지나치게 상투적인 가사. 선풍기의 바람은 끊임없이 먼지들을 부유하게 만들고, 그 사이에 유행가는 다른 사랑노래로 이어졌다. 창 밖에서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 마음 속에 빨래를 널어두고 간 그 사람은 날 잊지 않았을까. 빨래를 걷으러 돌아와줄까. 형광등을 켰다.



2001. 10. 1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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