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소설/짧은 소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멀고느린구름 2014. 7. 30. 08:16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 하는 거 이제 지긋지긋해!


여인 1이 여인 2를 향해 외쳤다. 까페에 앉은 사람 중 누구라도 그녀들이 앉은 자리를 돌아봤을 법한 크기의 목소리였다. 다만, 지금은 그녀들 외에는 나밖에 손님이 없었다. 아무튼 한 번 자기 이야기를 들어봐달라는 신호인 것 같아서 귀를 기울였다. 특별히 읽고 있는 신인작가의 소설이 실례가 되기에 두 손 두 발을 못 드는 게 원통할 정도로 재미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아, 그런데 두 손 두 발을 다 들며 상당히 꼴불견인 상태가 되기는 하겠다. 정확히 말해 내 몸매는 팬더과가 아니라 사마귀에 가깝기 때문에 그 광경은 더욱 참혹할 것이 틀림 없었다. 여인들의 대화는 빠르게 이어졌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누군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뭐야, 그 똥배 나온 아저씨?

아니, 그 아저씨 말고 나의 영원한 랭보 말이야. 

에?

왜 예전에 토탈 이클립스에서 디카프리오가 위험한 사랑에 빠진 미소년 시인 랭보 역을 맡았잖아. 나는 아직도 증기 열차에서 뛰어내리며 해맑게 웃던 그의 얼굴을 잊을 수 없어. 

그게 뭐야, 그럼 헐리우드 박물관에 가서 디카프리오 밀랍인형에 키스라도 퍼붓고 오던가. 

넌 나를 이해 못하는구나! 

누가 널 이해할 수 있는데? 


어쩐지 나는 여인 1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불과 30분 전에 나는 근처 미용실에 가서 랭보 시절의 디카프리오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와 같은 스타일로 염색을 해달라고 우기고 왔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머리카락의 색깔은 상당히 유사해졌으나, 모두가 예상하고 있는대로 내가 그 시절의 디카프리오가 되었을리는 만무하다. 그저 20세기 말의 <사춘기> 같은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 소년이 한 번쯤 시도해봤을 법한 중2병 스타일에 불과했다. 게다가 내 얼굴은 상당히 까만 편이어서 머리카락과의 극명한 채도 대비는 제법 미학적이었다. 


생각해봐봐. 쥴리엣, 그대는 왜 쥴리엣인가요. 라는 대사를 읊조리던 그 청년이, 침몰이 예견된 유람선 속에서 케이트 윈슬렛의 손을 붙잡고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춤을 추던 남자가, 나는 세상의 왕이라고 외치던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간 거냐고. 그 시절의 디카프리오는 정말 우리들의 왕이었잖아. 물론, 왕의 얼굴이 300원짜리 책받침 같은 데 프린트 되어 있거나 하는 건 조금 키치적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우리는 누구나 꿈꿨다구. 대학만 가면 당근 내 옆에는 디카프리오를 닮은 남자가 내 손을 꼭 붙잡고 캠퍼스를 걸어가고 있을 거라고 말야. 안 그래?

글쎄, 나는 디카프리오 취향이 아니라. 나는 브래드 피트 쪽이라서. 

어우, 넌 빵이었어?

어 빵이었어. 

배고프다. 빵 하나 시킬까?

뭘로? 

이거 맛있겠다. 스위트스트로베리슈거크림카스테라 케이크. 

무슨 주문 같다. 스위트스트로베리슈거크림카스테라 케이크 라니. 

디카프리오를 소환하는 주문이었으면 좋겠네. 


여인 1과 여인 2는 케이크를 주문했다. 당연히 그녀들의 테이블 위에 5분 뒤에 놓인 것은 디카프리오는 아니었다. 스위트스트로베리슈거크림카스테라 케이크였다. 그녀들은 케이크의 제일 꼭대기에 장식된 딸기를 사이좋게 반씩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번에는 여인 2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브래드 피트의 절정은 역시 <티벳에서의 7년>이 아니었을까 싶어. 나는 심지어 그 영화를 보고 불교에 귀의하게 된 거 잖아. 

아, 정말? 법정 스님 때문 아니었어?

어, 죄송하게도. 

그랬구나. 난 법정 스님 책 읽고 네가 또 반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했지. 하도 <산에는 꽃이 피네> 이야기를 많이 꺼내서 말야. 

그 책이 인상 깊긴 했지. 하지만 그 책을 읽게 된 것도 <티벳에서의 7년> 때문이야. 그 영화에서 브래드 피트가 보여주는 평화로운 눈빛에 반했었거든. 뭐랄까, 괜찮다 괜찮다 라고 영원히 다독여줄 것만 같은 그런 눈빛이었어. 

그런 눈빛이라면 디카프리오에게도 있었지. 로미오와 쥴리엣에서 어항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 첫 장면 있잖아. 그 때 그의 그 아쿠아블루 빛깔의 눈동자. 첨벙 뛰어들어서 헤엄치고 싶어지는 그런 눈동자. 

포기해라, 니가 국제결혼을 하지 않는 이상, 우리나라에서는 눈동자에 뛰어들어서 머드 축제나 먹물 축제 같은 거 밖에 못해. 

왜? 컬러 렌즈 끼면 되지. 21세기 아니니. 

하하, 뭐야 그렇게까지 해야 되는 거였어? 난 농담인 줄 알았는데. 

아유, 물론 농담이지 얘는. 중요한 건 눈동자의 색깔이 아니라, 그 깊이야. 아무리 파라면 뭐하겠어 그 바다에 깊이가 없다면 금세 바닥에 머리를 부딪칠 뿐인 걸. 꽝! 하고. 

많이 부딪혀 본 모양이네 그려. 

어. 그치 머. 하하하. 


그녀들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의 시간은 시계의 움직임으로 따지면 5에 있던 분침이 10으로 이동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들은 수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들은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가 있던 - 물론 지금도 있지만 - 시절의 바다에서 유영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뛰어든 바다는 각자 달랐겠지만 그 시절에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가 있었다는 것만은 같았다. 나는 덩달아서 몇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내가 뛰어들었던 눈동자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 바다의 넓이와 깊이, 온몸에 닿던 물의 감촉에 대해.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겠지?

얼마 전에 사진 올라온 거 못봤어?

봤어. 그 잔디밭에서 물총 쏘는 거 말이지. 

어.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니? 킥. 

정말 참혹하더라…. 

그렇더라….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

내가 잘할게. 

하하하 뭐야 그거. 

봄날이 가버린 거잖아 우리들의. 

아, 로미오. 그대는 우리들의 봄이었구나. 


그녀들이 내뱉는 한숨의 깊이가 서울역 공항철도 플랫폼의 깊이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디카프리오 부인이 원망스러워. 관리 좀 잘 시켜주지. 

그게 왜 부인 탓이야. 본인이 잘해야지. 

그렇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내버려둘 건 또 뭐야. 

본인의 소신이 있었던 거 아닐까. 

어째서 사람이 그런 소신을 갖게 되는 걸까. 

알 수 없지 뭐. 


여인 1은 진심으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여인 2는 여인 1의 그런 급격한 변화에 익숙한 듯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여인 1이 디카프리오가, 아니 스위트스트로베리슈거크림카스테라 케이크가 사라진 접시를 포크를 무의미하게 긁었다. 지난 인생의 잔여물을 애써 긁어 모으기라도 하는 것처럼. 


빵 다 먹었네….

브래드 피트는 이제 끝이야. 


어쩐지 여인 2의 말투에는 결연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었다. 


정말?!

응!

이제 안 만날 거야?

지긋지긋해 걔 바람 피는 거 참는 것도. 

또 바람 폈어?

그런 것 같아. 


갑자기 그녀들 사이의 기류가 바뀌었다. 남동풍이 북서풍으로 바뀐 것 같은 급격한 변화였다. 


휴… 너도 고단하구나. 얼마나 만났지 너 걔랑?

10년. 

너도 참 대단하다. 10년이라니. 하아….

그러게 10년이라니. 

….

너도 이제 그만 두는 게 어때? 그 오빠, 벌써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잖아. 우리 그만 두자 이제. 과거에 붙들려 사는 거. 


여인 2의 말에 여인 1은 쉽게 대꾸하지 않았다. 마치 다음의 말이 제 인생에 대한 판결이라도 될 것처럼. 숙고 끝에 여인 1이 말했다. 


그래,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 하는 거 이제 지긋지긋해….


그녀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어째서였을까. 나는 순간 여인 1쪽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아, 저기… 저도… 이해합니다. 정말… 이해합니다. 


여인 1은 잠시 당황해하다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답했다. 


고마워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머리를 하셨네요. 




- END -




2014. 7. 30. 멀고느린구름. 




'소설 > 짧은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생일선물을 잘못 사오거나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 1  (0) 2014.09.16
겨울바다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0) 2014.09.03
쓰리포인트 슛  (0) 2014.06.01
섬집 아이  (0) 2014.05.23
물망초  (0) 2014.02.19
Comments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