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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61년 12

멀고느린구름 2013. 11. 3. 09:46




  세 번의 밤이 지나고 네 번째 낮을 맞이했다. 아침 공기가 상쾌했고, 예전보다 온기가 서너 겹 더해졌다. 집 밖에서 갖가지 새들의 소리며, 곱단처럼 일찍 잠에서 깬 산짐승들의 발자욱 소리가 부지런히 들려왔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곱단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그이의 앞 머리를 쓸어 정돈해주고 모포에서 조심스럽게 나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햇살이 서양식 커튼처럼 나무들 사이에 드리워져 있었다. 허밍으로 출처 없는 가락을 흥얼거리며 몇 걸음을 걸었다. 곱단은 이북에 살 적의 일을 문득 떠올렸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풍금을 사달라고 조르던 일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르면 아버지는 마지못해 사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곱단은 더욱 더 악착같이 억지를 부렸었다. 이제는 아버지가 항복을 선언하고 말겠지 싶던 순간, 난생 처음으로 불같이 화를 내는 아버지를 보고 말았다. 곱단은 그날 밤 밤새 울고는 다시는 풍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좋아하던 풍금 소리마저 싫어하게 되고 말았다. 곱단은 문득 자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예감했다. 문득 자신이 벌써 노인이 되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때 아버지의 일그러진 표정. 그저 화가난 것만 같던 그 얼굴이, 슬픔의 얼굴이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아차렸다. 눈물이 났다. 


   울고 돌아온 곱단을 그이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꼭 안아주었다. 둘은 눈에 띄게 말라가고 있었다. 그이는 둘 다 죽는 것은 개죽음 밖에 되지 않으니 곱단에게 마을로 돌아가라고 했다. 곱단은 당연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이가 없는 삶이란 그저 무의미한 연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이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곱단은 개울에 물을 기르러 가는 그이의 뒤를 따랐다. 그이가 한참을 걷다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뒤따라 오던 곱단을 곁에 불러세웠다. 곱단은 무슨 얘기를 하려나 싶었는데, 대뜸 그이가 손목을 잡아왔다. 그이가 서양에선 연모하는 사람끼리는 이렇게 나란히 걷는대 라고 했다. 곱단의 가슴이 깡총깡총 뛰기 시작했다. 손목을 쥔 그이의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어 조금 손목이 아팠다. 그런데 곱단은 외려 그이가 소년처럼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더 좋았다. 말숙이에게 서양식 데이트라는 것도 해보았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 그럴 수는 없다고 고개를 가로 저으며 곱단은 다시 그이의 손아귀에 마음을 모았다. 


  개울에 다다라 그이는 수통에 물을 채웠다. 곱단은 곁에서 두 발을 담그고 찰방찰방거리는 놀이를 했다. 아침 햇살 속으로 튀어오르는 물방울들이 보석처럼 빛났다. 곧 그이도 곱단 곁에 다가와 찰방찰방이었다. 앉은 채로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맞잡았다. 셀 수 없이 많은 물방울들이 튀어올랐다. 모두가 빛났다. 무엇 하나 빛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개울도, 잎새도, 하늘도, 바람도, 그이와 곱단도 반짝반짝 빛났다. 그이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이처럼 하나도 빠짐없이 빛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돈보다 중한 것이 마음이라 했다. 언젠가 누구도 신분이나 돈으로 차별 받지 않는 세상, 상하고저가 없고, 빈부귀천도 없는 세상이 오리라고 그이는 믿었었다. 곱단은 그런 꿈을 품은 그이가 더욱 애틋하게 여겨져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이가 그런 곱단을 마주보고 수줍게 따라 웃었다. 이 사람과 함께 죽으리라. 곱단은 그때 다짐했다. 


  네 번째 밤, 곱단은 그이의 품속에서 행복한 꿈을 꾸었다. 꿈 속의 두 사람은 그이가 말한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두 아이를 낳아 기르고, 네 가족이 경작해 먹을 만큼의 조그만 밭이 있고, 거기에는 작지만 우직한 소도 한 마리 메어 있다. 아이들은 먼저 잠들고, 서양식 스탠드 하나만 켜놓은 방에서 그이가 새로 들여온 책을 읽어준다. 곱단은 나직한 목소리에 점점 잠 속으로 빠져든다. 곱단은 이대로 깨지 않기를 바랐다. 다섯 번째 아침이 밝아왔다. 곱단이 깨어나 본 것은 창밖에 자욱한 검은 연기였다. 




2013. 11. 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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