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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거위들 2

멀고느린구름 2015. 9. 13. 11:13


나는 그해 가을과 겨울을 지나는 내내 ‘거위들’의 노래를 들었다. 수능 시험을 보기 직전까지 내 귀에는 거위들의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장르를 뭐라고 해야 할지 나는 몰랐다. 그저 마음대로 나를 위한 장르라고 생각했다. 보컬인 캐롤라인의 목소리는 겨울 하늘을 닮았다. 투명하고 청아하지만 차가운 슬픔을 품고 있었다. 틈틈이 코러스로 들리는 기타 에르완의 목소리는 그냥 몹시 우울한 고등학생 소년이 아아 정말 우울한 날이야 라고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베이스를 맡은 모르간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그가 밴드 내에서 균형을 잡아주고 있는 사람임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캐롤라인과 에르완은 어딘가 비어 있고, 불안정한 인간들이다. 그에 비해 모르간은 정확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이들 셋은 어떻게 만나서 밴드를 이룬 것일까. 앨범에는 곡의 제목 외에는 아무 것도 실려 있지 않았다. 밴드 멤버의 사진 한 컷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한 장의 두꺼운 종이가 씨디 케이스 앞면에 끼워져 있을 뿐. 종이의 앞면은 표지. 뒷면에는 왼쪽 하단에 이 문구가 영어로 쓰여 있을 뿐이었다. 


프랑스 파리, 집에서 녹음

1995년 10월에 편곡

룬스는 에르완, 캐롤라인 그리고 모르간이다

고맙다


이거라도 써줘서 고맙다고 내가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사실, 세 멤버가 어떤 파트를 맡고 있는지조차 써있지 않았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은 분명 캐롤라인이었다. 여자 아이의 이름을 에르완이나 모르간이라고 짓지는 않을 것이므로. 에르완은 분명 팀의 리더일 것이다. 제일 먼저 그 이름을 밝히고 있으니까. 그리고 대체로 밴드의 리더는 기타리스트의 몫이다. 그러므로 기타를 치며 간간히 코러스를 하는 것은 에르완이었다. 남은 것은 베이스이므로 자연스럽게 모르간이 베이시스트가 된다. 


프랑스의 밴드이지만 이들은 영어로 노래를 불렀다. 뭔가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일까. 이들의 음반이 발매된 것이 1997년. 그 음반을 집어들었던 나의 시대는 2014년이었다. 세계는 그들을 모른다.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 받고, 목표를 잃은 채 단지 눈앞에 닥친 시험에 몰두했던 스무 살의 한국 여자 아이만이 그들을 알게 되었다. 17년의 시간 차. 음반을 낼 때의 그들이 스무 살이었다면 지금은 서른 일곱 살이 되어 있는 것이다. 헌데 어쩐지 그들은 여전히 스무 살에 머물러 있을 것만 같았다. 여전히 슈퍼스타를 목표로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나라에 수입이 되지 않고 있을 뿐, 프랑스에서는 제법 매니아층을 거느리며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게 추측일 뿐이었다. 


수능 성적이 발표되고, 나는 재확인하게 되었다. 선배에게는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선배는 어째서 혼자 그렇게 높은 곳으로 가버린 것일까. 아니, 그곳은 정말 높은 곳인 걸까... 나는 면피용으로 수도권의 아무 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학과 같은 건 부모님이 마음에 들어할 만한 경영학이나 중문학 같은 것으로 지망했다. 한 해가 지나고 새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개인 통장에 입금된 등록금을 보며 위험한 모험을 생각해버렸기 때문이었다. 



2015. 9. 1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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