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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거위들 1

멀고느린구름 2015. 9. 12. 10:34



거위들



“이걸 뭐라고 읽어야 하죠?”

“룬스. 거위들이라는 뜻이네요..”


중고 음반을 파는 가게의 점원은 자신 있게 말했다. 나는 4천 원에 낯선 외국 음반을 한 장 구입해 가게를 나왔다. 9월의 가운데였다. 바람은 아직 상냥한 냉기를 품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선배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재수를 하겠다고 수도 서울에 상경한 것은 작년 겨울 수능 결과가 발표된 이후였다. 재수를 선택하지 않아도 수도권의 중하위권 대학에는 입학할 수 있는 결과가 나왔지만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선배와 같은 대학교의 캠퍼스를 거닐 수 없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재수를 할 거에요.”

“힘들텐데...”

“보고 싶어요.”

“나도.”


선배는 단지 대화의 흐름에 맞춰준 것 뿐이었는지도 몰랐다. 단지 내가 그것을 모종의 허락을 받은 것으로 마음대로 해석했을 뿐이다. 나는 선배와의 통화 이후 일주일 만에 수도 서울에 입성했다. 먼 친척 집에 머물며 팔촌 정도가 되는 초등학생의 글쓰기 과외를 해주는 것으로 간신히 타협을 한 것이었다. 내가 머물게 된 곳은 서촌이었고, 선배는 신촌에 살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내가 다니던 입시 학원이 있는 종로에서 자주 만났다. 처음 겪는 수도의 겨울은 추웠고, 선배는 따뜻했다. 조금씩 끓어오르는 물처럼 우리의 관계는 봄을 지나며 뜨거워졌다가, 초여름에 100도씨에 이르렀다. 그리고 저무는 여름과 함께 식어갔다. 만나고, 사랑하고, 뜨거워졌다가 식어버리는 것. 그리고 영원히 남남이 되는 것. 동화나 드라마가 아닌 현실의 연애를 나는 처음 경험했다. 


선배의 이별 통보를 받고 백지가 된 채로 중고 음반 가게에 들어갔다. 선배를 대신할 수 있는 무언가라도 마음에 하나 적어두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공백한 마음에 던져지는 허망한 목소리, 단 한 장의 음반만을 남긴 채 사라진 프렌치팝 밴드’ 음반 포장 비닐에 붙어 있는 스티커에 쓰여진 문구가 마음을 끌었다. 표지의 면을 3등분 한다면 위쪽의 3분의 1은 공백, 아래쪽의 3분의 2는 흑백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흑백 사진 속에는 무리를 지어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하지만 한 남자 아이만은 쓸쓸한 표정으로 왼쪽 구석에 앉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또 한 여자 아이만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익살스런 표정을 지은 채 무리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걸어가고 있다. 나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두 아이를 오래 바라봤다. 그리고는 노래의 제목도 확인해 보지 않은 채 음반을 구입해 나온 것이다. 스무 살의 가을. 나는 모든 것을 잃고, 한 장의 음반을 얻었다. 음반의 이름은 ‘거위들’이었다. 



2015. 9. 1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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