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타라스 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빈센트 반 고흐는 썼다. 1888년 6월의 일이다. 고흐의 시대에 사람이 살아서 별까지 이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살아서도 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지도의 한 점으로 기차를 타고 가듯이 별의 한 점으로 갈 수는 없지만 가까운 달이라면 갈 수도 있다. 단, 몇 억 달러의 돈을 지불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고흐가 오늘날 태어났다고 해도 여전히 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죽음이 지름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조작이든 아니든 닐 암스트롱이 달에 닿은 이후 인류는 꾸준히 기술의 진보를 이룩하여 비로소 우주 왕복선이라는 것도 만들었고, 지구 밖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일도 가능해졌으며, 이제 달에 가는 일쯤은 상식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우리가 닿은 것이 정말로 '달'인가 라고 묻는다면 순간 망연해지고 만다. 달의 바다가 있었다는 달의 뒷면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둔다고 해도, 인간이 알아차린 달의 한 면은 잿빛 황무지에 불과했다. 허나 우리가 수 천년 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달이라고 하면 황금빛으로 빛나고, 그곳에는 열심히 방앗간을 수 천년 째 운영 중인 토끼 일족이 살고 있어야 마땅하다. 기술의 진보는 그 모든 꿈을 '환상'이라는 단어로 대체해놓았다. 불과 100여년의 나이를 지닌 것에 불과한 과학이 수 천년 혹은 수 만년에 걸친 사람의 환상을 바보 취급하는 것이 온당한가. 


그래서 사람들은 닐 암스트롱이 착륙했던 달이나, 수 억 달러를 모은다면 갈 수 있는 달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되려 과학의 냉정한 충고를 비웃으며 여전히 황금빛으로 빛나는 달과 그곳에 살고 있을 토끼 일족의 삶을 떠올린다. 낭만적인 사고일지 모르겠으나 역시 '별'이라고 한다면 그런 곳이어야 할 것이다. 135억년 전 기체들의 결합으로 생겨난 입자들의 덩어리라기 보다는. 미술 작품 전시회에 가는 일보다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는 일이 가장 큰 예술적 사치가 되는 가난한 사람들과, 슬픔과 절망이 켜켜이 쌓여 망연히 별빛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소망이 옹기종기 모인 곳이어야 비로소 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혹은 후회로 점철된 노인들의 골든 에이지들이 모여 황금빛을 발하고 있는 곳이어야 별이다. 


그러한 '진짜 별'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역시 죽음을 맞이하는 수밖에는 없는지도 모르겠다. 우주왕복선을 타고 몇 억 광년을 날아간다고 해도 사람은 영영 '진짜 별'에는 다다를 수 없을 테니까. 세상의 어떤 부족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하늘에 올라 별이 된다고 말했다. 그 전설은 아름답지만 쓸쓸한 이야기다. 별들은 서로 너무 떨어져 있으니까. 언젠가 내가 죽음을 맞이하여 내 영혼이란 것이 별이 되기 위한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같은 빛깔을 지닌 누군가와 함께 떠나고 싶다. 두 사람이 함께 모여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쯤은 더 밤하늘이 정다워 보인다. 생명이 죽어 별이 되는 것이라면, 별이 꼭 저 우주 속에 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내 속에, 그리고 당신 속에 깃든 별의 인자들은 우리가 잠든 밤에 이미 서로들 만나 별이 되기 위한 모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우리의 별은 이미 만나고 있는데... 현실의 당신은 참 멀리서 빛나고 있다. 그리운 이야. 



2013. 10. 16. 멀고느린구름


'산문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커피의 맛  (2) 2013.12.06
글을 쓰는 사람  (1) 2013.10.22
네스티요나와 하현의 달  (0) 2013.10.06
그래,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2) 2013.09.08
당신은 베지밀 A입니까? B입니까?  (4) 2013.06.08
Comments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