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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자는 범죄 현장에 반드시 다시 나타난다는 속설처럼, 이별한 사람들도 이별 현장에 반드시 나타난다. 이 문장이 성립하려면 따로 통계 조사를 해볼 필요가 있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통계청에서 일하는 직원이 아니다. 단, 언젠가 이런 조사에 흥미를 갖고 모험을 떠나려는 이를 위해 여기에 나의 예를 하나 들어둔다. 


  나로 말하자면 이별 현장에 반드시 나타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 물론, 나한테만 유명하다. - 최근에도 속절없이 이별 현장에 다녀간 일이 있었다. 그곳은 사람들이 늘 북적이는 곳이다. 그곳에서 어떤 이성끼리, 혹은 동성끼리 이별을 한다고 한들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자주 만났고,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고, 차를 마시고, 저녁을 해결했으며, 종종 영화도 보았다. 나는 범죄 순간의 짜릿함을 복기하는 범죄자처럼 우리가 걸었던 길을 되짚어 걸으며 지나간 날들을 떠올려 보았다. 기억이 현장을 만날 때면 생생한 현실처럼 변화한다. 떠나간 이가 마치 아직도 곁에 있는 것처럼 느끼며 에스컬레이터를 오르고, 네가 이 연필을 손에 쥐고 있으면 어떨까 하고 묻게 된다. 조금씩 마음에 물기가 들어차더니 이내 울적한 기분에 젖고 말았다. 


  기분 전환을 하려고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을 한 권 사고, 애용하는 커피 빈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허나 참 곤란한 일이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커플. 애써 책을 펼치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흔들리기 시작한 파도는 쉬이 멎지 않는다. 그때 흘러나오던 노래가 바뀌었다. 


  왓 어 원더풀 월드. 루이 암스트롱이 부른 원곡 버전이었다. 순간 서늘한 바람이 온 몸을 휘돌았다. 마음이 깃털처럼 그 바람에 나부꼈다. 흑인들의 고통스런 삶을 노래하며, 그럼에도 이 삶이 얼마나 아름답냐고 반문하는 암스트롱의 목소리. 책장을 덮었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한 음 한 음을 정성스레 들었다. 5분의 시간이 언제나 5분인 것은 아니다.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가 흘러나오던 5분도 언제나 그런 5분의 시간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빛이 바랠지라도 세월을 이기며 남을 기념사진 같은 시간이었다. 암스트롱이 내 앞 좌석에 앉아 흰 이를 환하게 드러내며 말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요." 


  노래가 끝난 후에도 노래는 계속 되었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음들을 속으로 되뇌이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의 일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새벽 바람이 차다. 바야흐로 가을이 다시 온 것이다. 그래,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2013. 9. 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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