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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채식주의자를 표방하고 있기도 해서 우유를 잘 마시지 않는다. 사실, 좀 더 본질적인 원인은 우유를 마시면 이상하게도 절반의 확률로 배탈이 난다는 데 있다. 두통이나 복통이나 아무튼 몸 구석 어딘가가 아픈 것을 지나치게 싫어하는 나로서는 괜시리 도박을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더구나 우유라고 하는 식품이 육신의 고통을 감수할 정도로 지고의 쾌락을 선사하는 식품도 아니지 않은가. 가끔씩 나는 불온한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가령 대관령 목장에 올라가 들판에 누워 소젖을 시원하게 빨아마시고 있는 인간의 풍경 같은 것 말이다. 요즘 하도 자연식 같은 게 유행을 하니까.
웰빙의 열풍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나는 어릴 적부터 두유를 즐겨 마셨다. 두유 애호가라면 누구나 겪었을 갈등이 있을 것이다. 바로 베지밀 A냐, B냐의 갈등이다. 오늘날에는 검은 콩 두유니 뭐니 하며 두유 제품의 품종이 상당히 늘어나 있지만, 한창 두유를 흡입하던 1990년대 무렵에만 해도 두유라고 하면 역시 베지밀 외의 제품을 상상할 수 없었다. 동네 슈퍼마켓의 음료 진열대에 서서 찬 냉기를 견디며 10대의 나는 항상 번민에 휩싸였다. A냐, B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떤 때에는 A를 선택했고, 어느 날에는 B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처음에는 '무엇을고를까요알아맞춰봅시다딩동댕동기법' 같은 것을 즐겨 사용했지만 점차 양자 중의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데는 일정한 경향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체로 몸이 가쁜하고 즐거운 기대에 차 있을 때는 담백한 A를 선택했고, 어딘가 불안하고 우울하며 슬픔에 흔들리고 있을 때는 B를 골랐다. 인생은 일희일비로 순환하기 마련이어서 대체로 A와 B를 번갈아 마시게 되는 나날이 이어졌다. 하지만 어느덧 서른이 넘어버린 지금에 와서 과거를 회고해보니 인생에도 어떤 경향성이 생겨나 있었다. 2004년 이후, 나는 거의 베지밀 B만 선택해왔고, 혹자에게는 베지밀 B만 부러 마시는 B매니아로 인식되기도 한 것이다. 내 삶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음을 여태 베지밀 B는 온몸으로 항변해왔던 것인데, 나는 미처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날이 더워 동네 슈퍼마켓에 들러 사온 두유 역시 베지밀 B다. 나는 지금 베지밀 B를 커피잔에 따라 마시며 이 글을 쓰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무한정한 세월이 흘러간다면 어쩌면 내 몸의 수분 속에는 일정량 이상의 베지밀 B가 함유되어 나라는 존재자체가 B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우연이겠지만 작년까지 내가 즐겨 다니던 홍대의 까페 이름도 까페 프로젝트 B였다. 게다가 나는 B형의 여자에게 주로 한 눈에 반해버리고, 과거 김윤아 씨가 진행하던 마담B의 살롱의 애청자였다. 음반에서 좋아하는 사이드는 역시 B사이드.
달콤하고 뒷맛의 여운이 오래가는 두유에게 하필 B라는 이름을 부여한 베지밀 제조사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오히려 선명한 맛을 지닌 B야 말로 우선 순위에 부여되는 A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았을까. A라는 이름은 '우수함, 보편적인, 평균 이상의, 멋진, 대표적인, 가장 먼저의' 등등의 속성을 갖는다. 내가 항상 즐겁거나 인생에 별다른 문제가 없을 때 베지밀 A를 손에 잡았던 것은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너도 나도 A의 인생을 지향해가는 가운데, 내가 B의 인생에 들어선 것도, B의 연애와, B의 문학, B의 교육에 속해 있는 것도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두유를 좋아한다면, 당신은 베지밀 A입니까? B입니까? B의 인생 속에는 얼마간의 슬픔이 더 깃들어 있을 것이다. 더 많은 굴곡과 외로움이, 캄캄함이 도사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빛은 어둠 속에서 맞이하는 빛일 것이다. 삶의 괴로움이 짙을 수록 우리는 더욱 더 달콤함 베지밀 B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달콤함은 A의 삶만을 살아갈 사람들은 영영 경험하지 못할 삶의 진미일지도 모른다.
2013. 6. 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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