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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사람
내가 글을 쓰는 책상 한 켠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글귀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하나는 황순원 선생님의 글이고, 다른 하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글이다.
"자기 속에 최상의 독자를 키우는 것이 작가가 해야 할 의무의 하나다."
이 글은 황순원 선생님의 유일한 산문집 <말과 삶과 글>에 수록되 있는 글 중 한 조각이다. 글쓰기에 있어 내가 평생의 신조로 삼아 왔던 말씀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글은 다음과 같다.
"작품은 작가를 뛰어넘지 못하면 재미가 없어집니다."
이 말은 하루키 씨가 가와이 하야오 라고 하는 심리학자와 대담하면서 언급한 것이다. 두 말은 다른 듯 닮아 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글을 써왔고, 나름의 성과도 내왔었기 때문에 내 주변에는 소위 '글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다보니 내게 이런 말을 해오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글쓰는 사람들은 좀처럼 믿을 수가 없어요, 글과 사람이 너무 다른 경우가 많아서요." 글을 쓰는 사람으로 오래 지내다보면 이와 같은 편견(?)이 꽤 일반적인 것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아마도, 대체로 글을 쓰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해보았거나, 혹은 연인 관계에 처해 있었던 사람들이 조금씩 흘린 말들이 커다란 파도가 되어 온 바다를 덮은 것이 아닐까.
나로 말하자면 사회적으로는 제법 훌륭한 인품을 지닌 것처럼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내게 그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혹은 '너마저?' 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보다 날것의 결론은 나의 옛 연인들이 잘 알고 있겠지만... 내 입장은 근거가 없는 소문은 없지만 역시 소문은 소문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상당히 모호한 답변이다.
이렇게 얘기해보면 어떨까. 글을 자기 성찰이나 정신적 수행의 방편으로 사용했던 과거의 선비들처럼 글을 대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언문일치'를 이루는, 소문에서 벗어난 사람일 것이다. 모르긴 모르나 대체로 그런 사람들은 애초에 글 쓰기를 업으로 삼았다기 보다는 그 인품의 고매함이 자연스럽게 글로 베어 들어, 특별한 글의 수행을 거치지 않았지만 힘이 있는 글을 쓸 수 있게 된 사람이다. 전문적인 수필가가 아니지만 오래 공부를 하고 만년에 산문집을 펴낸 노교수님들의 글을 보면 그런 힘이 깃들어 있다. 혹은 경지에 이른 종교인이나 강직한 정치인들 중에도 그런 글을 써내는 이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충분히 '언문일치'를 기대할 수 있겠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겠다고 다짐한 사람'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글을 쓰는 사람과 글이 써진 사람은 다른 것이다. 글로서 일가를 이루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의 글이 자기 자신을 뛰어넘지 못하면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다. 특히, 시인이나 소설가를 목표로 삼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자기 자신의 지평에서만 한계 내에서만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책상 앞에서 글을 쓰고 있을 게 아니라, 계룡산에 올라가 명상 수행을 하는 것이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한 지름길이 될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의 글은 언제나 그 작가 보다 훌륭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하루키 씨가 간파하고 있듯이 글이 재미가 없어진다.
작가가 쓰는 '글'이란 자신 속에서 최상의 한 순간을 포착해낸 것이다. 필요에 의해 자신의 최저를 드러내게 되더라도 언제나 글은 최상의 한 순간을 향해, 절정을 향해 상승하도록 되어 있다. 반대로 최저만을 드러내는 글이라고 하더라도, 좋은 글이라면 그 강한 부정의 에너지는 기저에 강한 긍정의 힘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작가가 써내는 글이란 대체로 '그 작가가 다다를 수 있는 최상의 순간'이라고 보는 것이 알맞다. 비단 작가가 아니라고 해도 누구나 자기 속에 있는 긍정의 에너지가 최고점에 다다르는 최고의 순간이 있을 수 있다. 한 없이 너그러워지고, 관조적이 되고, 불굴의 용기를 지니게 되는 순간이 있다. 작가와 보통 사람의 차이는 보통 사람의 경우는 그야말로 그것이 한 순간이어서, 그 순간이 지나버리고 나면 그 사람이 지녔던 최상의 이미지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그 사람이 보였던 최상의 이미지와 평소에 보이는 대부분의 평범한 이미지들 사이의 평균값으로 이뤄진다. 글을 쓰는 사람이 가장 곤란한 점은 그가 보인 '최상의 순간'이 다른 보통사람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작가란 그렇게 잠시 불꽃처럼 빛났다가 사라질 '최상의 순간'들을 무수히 많이 써서 되도록 오래 사라지지 않을 반영구적인 기록으로 남겨두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오해, 내지 부정적 소문은 거기에서 기인한다.
정리해 말하자면, 작가의 글이 곧 작가 자신이 될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작가는 작가로서 명백한 한계를 지닌 작가다. 그렇다고 소문처럼 작가가 거짓된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진실을 쓰는 사람이어야 한다. 단지, 현실 속에서는 작가 자신도 지속해낼 수 없는 최상의 순간을, 최상의 자신을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 독자는 작가의 글을 작가 자신과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작가와 글을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읽으려할 필요도 없다. 작가가 쓰는 모든 글들은 그 작가가 지닌 최상의 가능성이라고 보면 족하지 않을까.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쓰는 글과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부득이하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 속에 좋은 가능성들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현실 속에서 그것을 끌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글의 몫이 아니라, 관계의 몫이다. 첨언하면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내가 쓰는 글들이 내 삶의 좌표가 되어주었다. 비록, 글을 쓰던 그 순간에는 내가 글보다 한참 모자란 인간이었을 수 있겠으나... 현실속의 나는 언제나 내가 쓴 글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분명 글을 쓰지 않았다면 현실의 나는 훨씬 더 형편없는 인간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요즘 내가 쓰는 글에서 드러나는 내 최상의 순간은, 지금의 나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미래에 가능한 나다. 글을 쓰는 사람을 겉과 속이 다른 사람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꼭 말하고 싶은 것은, 길을 알고 가는 사람과 길을 전혀 모르고 가는 사람이 도착할 수 있는 곳은 다르리라는 사실이다.
2013. 10. 2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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