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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네스티요나 EP 음반에는 요나 씨의 사인이 선명하게 쓰여져 있다. 쌈지 바람 라이브 콘서트장이 아직 건재하던 시절, 공연 현장에서 받아온 것이다. 처음 'cause you're my mom'을 듣고 받은 음악적 충격은 아직도 선명하다. 와, 이런 것도 만들 수 있구나. 이런 감성이 한국에서도 태어날 수 있구나 찬탄하며 몇 번이고 되풀이해 들었다. 같은 EP 음반에 수록된 '이렇게'는 한동안 휴대폰 벨소리로 쓰기도 했다. 2008년 3월에 마지막으로 그녀의 모습을 공연장에서 보고, 나는 군에 입대해야 했다. 그것이 마직막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군에서 2집 발매 소식을 듣고 일부러 휴가를 내서 나와 매장에서 씨디를 샀다. 이후 공연 소식을 수소문했지만 알 수 없었다. 요나를 제외한 멤버들이 탈퇴하여 '텔레파시'라는 새 팀을 꾸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무래도 네스티요나는 요나의 팀이었기 때문에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지만 혼자 남게 된 그녀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그러던 차에 그녀의 개인 홈페이지를 알게 되었고 이따금 찾아가 그녀가 남긴 글들을 읽게 되었다.
<하현의 달>은 <천사가 아니야>, <내 남자친구 이야기>, <나나> 등으로 유명한 일본 만화가 야자와 아이의 세 권짜리 중편이다. 이 만화의 여주인공 미즈키는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런던 출신 뮤지션 아담을 만나고 그에게 이끌려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는다. 미즈키의 의식은 현재의 기억을 잃은 채 낡은 유럽식 건물에 갇히고 만다. 미즈키는 그곳에서 과거의 아담과 함께 현생이 아닌 전생의 자신, 사야카로서 미래가 없는 봉인된 삶을 살게 된다.
네스티요나에서 요나가 만들어 냈던 음악은 어딘지 오래된 과거에 닿아 있다는 느낌을 자아냈다. 너무나 아득한 과거에서 들려오는 소리이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미래의 것처럼 감각됐다. 구약성경의 요나서에서 요나는 신의 부름을 받아 거대한 물고기의 뱃속으로 들어가 3일을 지낸다. 여기서 요나컴플렉스라고 하는 모태소귀본능, 즉 엄마의 뱃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에 해당하는 심리증상이 착안되었다. 네스티요나의 음악은 요나서의 이야기처럼 아득한 태고의 자궁 속으로 여행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백그라운드뮤직이기도 했다.
그런 음악을 만들어내던 요나 씨는 최근 몇 년간 마치 <하현의 달>의 미즈키처럼 하얀 궁전 속에 갇힌 사람 같다. 예언자 요나가 커다란 물고기 속에서 3일을 지냈다면, 음악가 요나 씨는 하얀 궁전 속에서 수 년을 지내고 있다.
"삶은 고통"이라는 싯다르타의 말은 고통 때문에 삶을 체념한 자의 말이 아니라, 그 고통을 똑바로 응시하겠다는 다짐의 말이다. 마찬가지로 요나 씨가 어떠한 사정에서든 하얀 궁전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은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외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겠다. 직언하지 않지만 그녀가 써내려간 일기 속에 담긴 조용한 고통을 감지한다. 적어도 고통을 말할 수 있게 된 사람은 고통을 외면하려는 사람은 아니다. 고통을 자기의 몫으로 지긋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그 고통에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심리학에서 모태소귀본능은 부정적인 것으로 다루어지지만 나는 그저 현실을 감내하기만 하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서라도 삶의 답을 모색해보려는 이들이 더 착실한 인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른 새벽, 나는 내 파란 궁전 속에서 네스티요나의 처음으로 돌아가 EP 음반을 듣는다. 되풀이해 듣는다.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동안 떠난다면 얼마나 멀리 떠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멀리 떠난다고 해도 우리가 있던 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 만큼만 떠날 뿐이다. 우리의 삶도, 별들의 삶도 서로 다르지 않다. 모쪼록 내게 아름다운 순간들을 선물했던 요나 씨가 하얀 궁전 속에서 건강하기를, 그곳에서 바라본 고통들에 대해 다시 천천히 소리내어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2013. 10. 6.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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