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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비틀즈, 기억하고 있습니까 5

멀고느린구름 2013. 3. 17. 07:22




조금은 변했겠지만 평생동안 기억할 만한 곳이 있죠

어떤 것은 영원하고 어떤 것은 더 좋아지진 않았죠

사라져버린 것도 있고 그대로인 것도 있죠

이 모든 곳에는 그때의 순간들이 남아 있어요


후임 기사가 무언가를 중얼거리기에 처음에는 괴이한 혼잣말을 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서야  그가 ‘인 마이 라이프’의 가사를 무려 실시간으로 번역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정체가 점점 궁금해졌지만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하아... 정말 정말 부럽습니다...”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그가 말했다. 다행하게도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지는 않았다. 후임 기사는 놀이동산에 처음 방문한 꼬마처럼 빛나는 눈동자로 여기저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조금 무리해서 인테리어를 한 보람이 있었다. 덕분에 2년간 갚아야 할 카드 빚이 생겼지만 이 정도의 반응을 종종 접할 수 있다면 대만족이었다. 페이스북에 선임 기사에 대한 비판 글을 다 작성해 올린 뒤 취업 정보 사이트를 순회했다. 논술 첨삭 교사를 모집한다는 글에 잠시 눈길이 머물렀다. 논술 열풍도 이제는 시들했다. 중산층 이상 가정의 아이들이 반드시 배우게 되는 피아노나 바이올린처럼 논술도 이제 우아한 취향의 한 종류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논술을 배운 아이들은 자라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논리적인 주장을 펼칠 수 있게 될 것이다. 논술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자기네 부모가 살아온 대로 살게 되겠지. 재능기부를 받는 공부방을 살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내 코가 석자였다. 그러니까 2년 간 갚아야 할 카드 빚이 있으니까. 도덕은 언제나 경제의 뒷전이었다. 


“이야.. 이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베개 싸움이군요!”


후임 기사가  A3 크기의 비틀즈 화보집에 실린 사진을 내게 들어보이며 말했다. 나는 생긋 웃으며 미소로 화답했다. 구글 검색에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베개 싸움이라고 입력했더니, 과연 그가 들어보인 사진이 나왔다. 그의 정체는 대체 뭘까. 허나 호기심보다는 제발 그가 빨리 내 집에서 나가 주었으면 하는 욕망이 더 크게 자라고 있었다. 나와 그 사이의 갑과 을의 관계가 역전되는 것을 겪고 싶지 않았다. 논술 첨삭 교사 같은 건 역시 그만 두자 싶었다. 이제는 좀 더 제대로 된 직업을 얻어야 했다. 가령 가스보일러 설치 기사 보다는 훨씬 더 좋은 직업. 그렇게 되려고 없는 형편에 대학원까지 다닌 것 아니었나. 아, 예전부터 가고 싶어했던 출판사의 채용 공고가 떴다. 


“앗싸!”


아차,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후임 기사의 질문이 곧바로 날아들었다. 


“하하, 뭔가 좋은 일이 있으신가보죠?”


청문회장에 선 공직 인사 후보자가 된 심경이었다. 적어도 난 병역비리는 없었다. 


“예, 아니요.”


바보 같은 대답이었다. 후임 기사는 씨익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내 사진집으로 눈길을 다시 돌리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지구가 멸망하기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태도였다. 인 마이 라이프라는 구절이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후임 기사가 사진집을 감상하는 모습을 감상했다. 어쩐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먼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슬프지만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깃든 풍경이었다. 정오의 햇발이 주방으로 점점 걸어오고 있었다. 음들이 빛과 부딪치며 더욱 찬란한 소리를 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섰다. 유리창을 활짝 열자 부드러운 실바람이 가늘가늘 불어왔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뱉었다. 따스한 봄볕이 온몸을 흠뻑 적셨다. 그 사이 선임 기사가 거칠게 문을 밀고 들어왔다.


“야, 넌 또 뭐하냐! 앙! 리모콘 설치 다 했어?!”



2013. 3. 1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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