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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죄송합니다. 선배님!”
후임 설치기사는 소리 높여 정중하게 사과했다. 이어서 나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보일러실 쪽으로 절도 있게 걸어 갔다. 선임의 핀잔이 날아들었지만 그는 의연했다. 곧 선임 기사가 보일러실에서 나왔다.
“신문지 없어요?”
앞 뒤 맥락이 전혀 없는 질문이었다. “네?!” 라고 물어도 선임 기사는 신문지가 있어야 하는데 라는 말만 반복했다. 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읽은 쪽은 역시 후임 기사 쪽이었다. “보일러실까지 갈 때 신발을 신었다 벗었다하는 게 영 번거로운 일이라서요.” 그제야 나는 아아 라고 깨달음의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신문지가 하나도 없어요.” 나는 일간지 신문 구독자가 아니었으며, 매일 아침마다 지하철 역 앞의 무가지를 일일이 챙겨보는 타입도 전혀 아니었다. 덕분에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호하게 신문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거 밖에 쓰레기장에 신문지 같은 거 많드만 그것 좀 주워와봐요.” 선임 기사의 말이었다. 잠시 혼란스러웠다. 나에게 하는 말인가 후임에게 하는 말인가. “아, 좀 가져와요.” 라고 말하며 선임 기사가 나를 쳐다보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나에게 하는 말임을 확정할 수 있었다. 허나 역시 또 혼란스러웠다. 이게 지금 대한민국의 상식과 도덕에 맞는 말인가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비상식적인 언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선임 기사의 음성에 확신의 힘이 서려 있었다. “잠깐 연장 좀 가져올 테니까. 신문지 좀 찾아다놔요. 안 그러면 여기 바닥 그냥 밟고 갑니다.” 최후통첩을 하고는 선임 기사는 아랫층으로 내려가버렸다. 후임 기사는 자기와는 상관 없는 일이지만 유감이라는 듯이 목례를 하고 선임의 뒤를 따랐다. 혼자 남은 주방에는 ‘닥터 로봇’을 외치는 풀벌레 소리만 가득했다. 선임 기사의 말을 따르는 것과 따르지 않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내 체면을 살릴 수 있는지 곰곰이 살폈다. 따르지 않아서 후임 기사와 똑같은 취급을 받으며 핀잔을 듣는 것보다, 주방 바닥도 지키고 불쾌한 핀잔도 방지하는 쪽이 낫겠다고 결정했다. 외투를 걸치고 아랫층으로 걸어내려갔다.
주택 단지 내의 거의 모든 곳이 동시에 도시가스 배관 설치를 지난 주에 마친 터라 온 바닥이 다 뒤집혀 있었다. 지진이 휩쓸고 간 마을처럼 흉흉했다. 선임 기사가 쓰레기 분리수거장 쪽으로 가서 폐지 코너 쪽을 살폈지만 철 지난 성인잡지 한 권이 바람 결에 펄럭이고 있을 뿐이었다. 저 걸 가져다가 주방 바닥에 펼쳐 놓았다간 순식간에 주방이 고대 인도의 밀교사원이 될 것이다. 선임 쪽은 그렇다 쳐도 후임 쪽에게 그런 광경을 선사하고 싶지 않았다. 하늘에는 고흐, 땅에는 카마수트라라니. 나로서는 이것으로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오늘따라 꽃샘 추위가 유난했다.
종종걸음으로 203호로 돌아왔다. 비틀즈를 무대에서 내리고 이번에 올린 것은 카펜터즈 였다. ‘예스터데이 원스 모어’가 은은하게 주방을 채웠다. 내려놓은 식은 커피를 마시며 취업 정보를 검색했다. 출판사라던가, 기간제 국어교사 등(정규직은 이미 포기했고)을 원했지만 좀처럼 공채하는 곳이 없었다. 아르바이트식으로 보습학원 강의를 나가는 것은 이제 그만 두고 싶었다. 혼자 살기에 무리는 없다고 생각했던 벌이였지만 점점 빚이 늘어나고 있었다. 신용카드 사용을 멈추려고 매 달마다 가위를 집어 들었지만 번번이 월급으로 빚을 갚은 다음, 생활비 생각에 포기하고 말았다. 신용 카드로 생필품을 사고 그것을 월급으로 갚는 식의 굴레가 끊어지지 않았다. 되려 신용카드 사용액과 월급 간의 격차가 야금야금 벌어지고 있는 판이었다. 이사 초기에 무리해서 사들인 집의 가구들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한숨이 쉬어졌다. 되팔까 싶다가도 가끔씩 사람들이 찾아와 훌륭한 인테리어를 칭찬하고 가면 이내 그런 생각은 사라지고 말았다.
띵동. 그들이 다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따귀를 얻어 맞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아 거 참 이 사람, 신문지 좀 갖다 놓으래도.” 선임이 신경질적으로 말을 뱉었다. 선임 기사는 신발을 벗고 주방에 올라선 후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보일러실로 직행했다. “야! 가서 신문지 좀 찾아와!!”. 욱하는 기운이 솟아 올라 나는 당장 보일러실로 쳐들어가 선임 기사의 멱살을 잡으며 꺼지라고 외쳤다. 라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제자리에 선 채 모욕감에 몸을 떨었다. “이해하세요. 제가 좀 얻어오겠습니다.” 후임 기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며 나긋하게 말해주었다. 불길이 좀 누그러졌다. “이번에는 카펜터즈네요. 고상한 분이신데 이것 참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방에 들어가서 편하게 앉아 계세요. 이쪽은 맡기시고.” 나보다 나이가 한참은 많아 보이는 후임 기사의 신사적인 태도에 불길은 완전히 연소되었다. 공자가 말한 군자란 이런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그의 처방전 대로 나는 작은 방에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페이스북 뉴스피드에 선임 기사에 대한 냉정한 비판 글을 작성했다.
2013. 3. 1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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