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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다했습니다. 선배님.”


후임 기사가 당황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우당탕하는 요란한 소리가 막 시작된 노르웨이의 숲의 가사들을 지웠다. 


“아이고 이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내게 연신 정중하게 고개를 꺾으며 사과를 하는 후임 기사의 모습에 왈칵 울음이 솟구쳤다. 입술을 앙다물었다. 꼬았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사레를 치며 괜찮다고 일렀다. 그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싶어졌다. 


“너는 진짜, 사사건건 이게 뭐하는 거냐?! 이래 가지고 제대로 일 해먹겠어! 내가 항상 그랬냐 안 그랬냐? 일이 다 끝난 다음에 노가리를 까든지 잠을 쳐 자든지. 참 나... 이 새끼 진짜.”


무뢰한은, 아 선임 기사를 이제 무뢰한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와중에도 후임 기사를 나무랐다. 무뢰한은 정말 무뢰한 선임병과 같았다. 두 사람은 보일러실로 함께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M 출판사의 홈페이지에서 입사원서를 다운로드 받아 작성하기 시작했다. 경력란에 논술 첨삭 교사니, 정부 지원 중소기업 인턴 경력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썼다. 곧 딜리트를 연타했다. 논술 첨삭 교사라고 해봤자 장당 2000원을 받는 대학생 아르바이트에 ‘교사’라는 이름을 함부로 갖다 쓴 것에 불과했고, 정부 지원 중소기업 인턴이라는 거창한 경력은 수돗물을 활용한 새로 만든 식수의 지하철 판촉 사원 경험이었다. 어느 쪽도 출판사에서 하려는 일과는 하등의 상관 관계가 없었다. 음악 평론가 활동. 역시 썼다가 곧 지웠다. 반드시 후임 기사가 무뢰한과 함께 주방으로 다시 나왔기 때문은 아니었다. 


“자, 다 끝났습니다~ 잠깐만 와보세요. 리모콘 쓰는 법 알려드릴게.”


자리에서 일어나 무뢰한 가까이 다가갔다. 


“뭐 시원한 것 좀 없습니까? 목이 타서...”


기름 때가 잔뜩 낀 소매로 땀을 닦으며 무뢰한이 요청했다. 냉장고에서 델몬트 주스 병을 꺼내 아끼는 컵과 아끼지 않는 컵에 주스를 나눠 따른 뒤 둘에게 내밀었다. 아끼는 컵은 후임 기사, 아끼지 않는 컵은 무뢰한 쪽 앞에 놓였다. 하지만 무뢰한은 거침없이 후임 앞에 놓인 아끼는 컵 쪽을 채갔다. 


“난, 이 컵이 더 맘에 들어서요. 하하. 리모콘 쓰는 건 이 친구가 잘 설명해줄 겁니다.”


무뢰한이 손 부채질을 하며 식탁 앞 의자에 앉아 오렌지 주스를 마시는 사이, 후임 기사는 엉거주춤 리모콘의 기능에 대해 이것저것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주스를 담은 컵을 바꿔주고 싶었다. 설명이 다 끝났다. 나와 두 설치기사는 할인마트에서 산 싸구려 목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티타임을 가졌다.  비틀즈는 아홉 번째 트랙인 ‘걸’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저 시끼들, 저 때 마약했다고 난리도 아니었지. 저거 스읍하고 빠는 소리 있잖아요. 저게 그거래 마약 빠는 소리.” 


라고 말한 것은 놀랍게도 무뢰한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후임 기사는 그다지 놀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하, 선배님 라이브 가면 왜 담배 빨면서 저 노래 불렀잖습니까. 저거 다음엔 항상 뭐였죠 그거.”


후임 기사는 존경의 눈빛을 띤 채 무뢰한을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링 위에서 원투 스트레이트를 연속으로 맞고 있는 기분이었다. 


“캬... 예스터데이였지. 그때가 언제냐 대체...”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언젭니까 그때가... 저는 이 청년 집을 보고 있으니까 그때가 생각나지 뭡니까. 우리 꿈 아니었습니까. 이런 집에서 자유인처럼 살고, 평생 음악과 함께 하는 거.”

“자유인... 음악과 함께... 하하핫.”

 

무뢰한, 아니 선임 설치 기사는 회환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주스를 한 모금 한 모금 삼켰다. 셋은 잠시 아무 말도 않은 채 비틀즈의 음들이 정오의 빛들과 부딪치는 소리를 감상했다. 봄이 돌아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얼었던 강이 풀리고, 단단한 흙을 뚫고 싹이 트고 있을 것이다. 파도는 조금 더 너그러워질 것이고, 소년과 소녀의 가슴은 설레기 시작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설렘은 이윽고 사랑이 될 것이다. 사랑이 시작될 것이다. 길 잃은 자는 길을 잃은 것에 만족하고, 길을 찾은 자는 길을 찾은 것에 만족하도록 햇볕은 어머니처럼 내리쬘 것이다. 


“실례지만 저거 좀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랜덤재생으로 설정해두었던 <러버 소울>이 ‘걸’에서 끝나자, 후임 기사가 주방 한 켠에 세워둔 통기타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용한 지 오래되어 소리가 날지 의문이었지만 선뜻 허락했다. 후임 기사는 바로 일어나 기타를 가져와 자리에 앉았다. 선임 기사는 여전히 과거 속에 잠겨 있는 듯했다. 후임 기사가 기타를 퉁기기 시작했다. ‘예스터데이’였다. 숙련된 손놀림이었다. 코드를 짚어내는 손가락에는 힘과 절도가 있었다. 내 기타가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선임 기사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가슴 깊이 파고드는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거친 삶의 결이 그대로 소리가 되어 마음의 표면을 긁었다. 힘이 서려 있었지만 힘을 주지 않은 소리였다. 온 마음을 다해 부르고 있지만 대충 부르는 듯한 노래였다. 보고 싶은 것을 지금 눈 앞에 보고 있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영 볼 수 없다는 듯한 읊조림이었다.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과 이별이 한 순간에 동시에 펼쳐졌다. 아, 아아. 끝내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끊이지 않았다. 


지난 날 사랑은 그렇게 쉬운 게임이었는데,

이제 난 숨을 곳이 필요해요

오 난 지난 날을 믿어요






2013. 3. 2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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