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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배달부의 나무
그도 몰래 나무 한 그루가 희붐히 피었다. 나무의 머리카락은 머다래서 올려다보면 먼 우주 별 자리의 신화들이 밤마다 가지에 앉았다. 그의 나무를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다만 그 혼자만이 조그맣게 열린 창으로 나무를 바라보곤 하는 것이다. 여름이어서인지 한 차례 비가 올 때마다 나무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꼭 그가 바라보는 우주를 다 덮어버릴 기세로.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제복을 입고 우체국으로 향하는 이였다. 요즘은 이메일이 활성화 된 까닭에 우편업무가 줄긴했지만, 그래도 그가 일하는 곳은 바쁜 편이었다. 그의 일은 편지를 각각의 주소로 배달하는 일이다. 가끔 엉뚱한 주소로 편지가 가기도 했지만 대부분 제 주인을 찾아갔다. 사람들에게는 그 마음 속에 저 마다의 주소가 있어서, 사실 편지는 어떤 집으로 배달되는 것이 아니라 받는 이의 마음의 주소로 배달 되는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깜박 편지를 잃어버려도 마음 주소에 도착한 편지는 고이 남겠지.
찌르릉 소리를 내며 그의 자전거는 오늘도 그리운 마음의 주소를 향해 달리고 있다. 저녁이 되면 고단한 몸을 이끌고 그가 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뒷편으로는 해가 저물고, 그의 집은 짙은 주홍빛으로 물든다. 문을 열면 그 주홍빛이 덥썩 방안까지 들어섰다. 그렇게 모든 아쉬움은, 그리움은 덥썩덥썩 가슴 한 복판까지 뛰어들어오기 일쑤였다.
방 안에 들어와 무심코 TV를 켜면,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얼굴들, 목소리들. 그는 안도의 한숨인지를 내쉬며 등베게에 풀썩 기대어버렸다. 여름밤은 너무도 긴 것 같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루하루 자라나는 나무가 창 안으로 들어올 시원한 바람들을 떡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저걸 베어버려야할텐데... 그는 매일 밤 뒤척이며 매일 밤 같은 다짐을 해보는 것이다.
그녀에게 보낸 편지는 그의 우체국으로 매일 되돌아왔다. 그는 늘 자기가 쓴 편지들을 자신의 주소로 배달해야했다. 그가 쓴 편지들은 그녀의 집에 닿았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도착하지 못했다. 그러기를 벌써 5년. 그가 그녀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은 5년전 그가 군대를 가고 부대를 배치 받은 후부터였다. 그녀는 이미 그와 상관없이 다른 이를 만나 서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에게 꾸준히 편지를 쓴 것이었다. 물론 그의 편지는 언제나 그의 부대로 배달되었다. 그녀가 이사 갔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는 바보마냥 계속 같은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 언젠가는 닿을 거야. 하지만 그가 제대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가 어느 유수한 사업가와 결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그의 긴 여름밤은 계속 되고, 그의 나무도 끊임없이 자라 그의 창 안까지 가지가 뻗어올 즈음. 그는 같은 우체국에서 일하던 여직원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새 신부를 맞기 위해 그는 집을 정리했다. 청소를 끝내고 남은 건 오랜 세월 간직했던 편지들과, 그를 숨막히게 했던 창 밖의 나무. 아니, 이제 그의 집과 가지와 뿌리로 이어져버린 그 나무 뿐. 그는 내일 모든 것을 정리하리라 마음 먹고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꿈 속에서는 어느 새 그녀 대신 우체국 여직원이 등장했다. 삶은 가볍게 흘러갔다.
찌르릉 자전거 소리가 저녁놀과 뒤섞이고,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오늘 그의 손에는 편지가 들려있지 않은 것이다. 오늘 그는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방안으로 들어와 낡은 서랍 속의 편지들을 꺼내 이제는 버려야할 자기의 마음들을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깊디 깊은 여름밤이 함박눈처럼 소복소복 쌓여갔다. 편지를 다 읽은 그는 조용히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나무를 향해 손을 뻗어 보듬어 보았다. 그랬더니 나무는 반딧불이 마냥 영롱한 비취빛으로 반짝거리더니, 까무룩 그녀의 미소로 변해 멀리 밤하늘로 날아가 별이 되는 것이었다.
꿈이었을까. 아주 오랜만에 세상의 바람이 그의 얼굴을 향해 불어왔다. 하지만 그 바람은 왜 그렇게 시리고, 무표정했던지. 그 후로 그는 여직원과 결혼했고, 승진도 해서 이제는 조그만 마을의 우체국 국장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왠지 그가 변한 것 같다고 수근 거리곤 했다.
오랜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그 사랑을 잃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 혹은 그 사랑과 함께했던 삶을 잃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젠 아주 오래전, 그가 마지막으로 그였던 여름 밤. 그가 읽었던 편지들, 그 끝 귀퉁이에는 그녀의 글씨가 조그맣게 적혀 있었다. 한결 같은 목소리로.
"사랑..."
편지가 배달되는 곳은 그 사람의 마음의 주소. 사람들은 자주 그 사실을 잊고, 서로 바라보며 그리워한다. 사랑은 세상의 바람을 막아주는 삶의 나무. 사람들은 너무 큰 사랑에 숨막혀 하기도 한다.
2001. 9. 2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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