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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비틀즈, 기억하고 있습니까 4

멀고느린구름 2013. 3. 15. 21:28




5분 정도가 지났을 때 후임 기사가 신문지를 한 뭉텅이 들고 나타났다. 선임 기사는 어김 없이 핀잔을 주었다. 고작 그 정도 가져와서 어쩌자는 거냐고 나더러 들으라는 듯이 보일러실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분명히 카펜터즈는 노래하고 있었지만 전혀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함이 솟구쳤다. 여기는 내 집이다. 내 집의 공기를 빙하기 이전으로 돌려놓을 권리가 저들에게는 없다. 푹푹 한숨을 내쉬며 한 켠에 모아둔 이면지 여러 장을 집어들고 주방으로 갔다. 듬성듬성 놓인 신문지 사이의 간극을 이면지로 채웠다. 후임 기사가 어쩔줄 몰라하며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지나친 예의는 부담스러웠다. 선임 기사가 보일러실에서 나오며 이면지로 보충된 바닥을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게 진작 좀 이렇게 내놓으시지. 어이구 그런데 이거 비싼 종이를 막 이렇게 써도 됩니까?” “이면지라서요. 괜찮습니다. (마음껏 짓밟아 보시죠).” 선임 기사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후임 기사에게 컨트롤러 설치를 맡긴 후 다른 동에 잠시 다녀오겠다며 나갔다. 후임 기사와 단 둘만이 남았다. 


“커피 좋아하세요?” 

내가 물었다. 

“아, 네 좋아합니다.”

“그런데 저희 집에 원두 커피밖에 없는데...”

“더 좋지요. 아... 그런데 참 젊으신 것 같은데 부럽습니다. 굉장히 격조 있게 사시네요.”

“아닙니다. 별 말씀을. 그럼 커피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이게 기계가 아니라 손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라서요. 좀 시간이 걸립니다. 괜찮으신가요?”

“아 물론입니다. 그동안 저는 이거 컨트롤러를 다 달아 드리죠.”

“네, 그럼.”


후임 기사와 나는 각자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 수행한 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놓인 푸른 의자와 붉은 의자에게 각기 앉았다. 갓 드립한 케냐 AA의 커피향이 주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이 블루칼라의 남자가 루이 암스트롱마저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 그의 명곡들만 담은 베스트 음반을 켜두었다. “뉴올리언즈에서 만약 저 남자가 권총을 오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생에는 가정법이 영 쓸모가 없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면서 후임 기사는 커피 잔에서 피어오르는 증기를 입으로 불었다. 그 행동은 굉장히 지적으로 보였다. 나는 순간 그가 정치적인 이유로 강단에서 쫓겨난 대학 교수가 아닐까 추측했다. 청렴결백하게 살아왔고, 버는 족족 사회에 환원을 하며 산 탓에 당장 직장이 사라지니 생계가 곤란해진 것이다. 아니면 때를 같이하여 자녀가 대학원에 진학했을 수도 있었다. 후임 기사가 말을 이었다. “젊은 선생님은 음악을 하시나 봅니다.” 그가 주방에서 바로 엿보이는 내 집필실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집필실에는 길에서 우연히 주워온 고풍스런 책상이 정 가운데 놓여 있었지만, 그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두 대의 일렉 기타와 야마하제 키보드였던 것 같았다. 음악을 하는 친구가 이사를 가며 버리려는 것을 얻어와 지난 1년간 두 세 번 건드려 보았을 뿐이었다. 


“아, 네 음악을 하는 건 아니고. 음악평론을 합니다.” 


명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2년 전에 나는 드뷔시의 음악에 대한 짧은 에세이를 당시 인턴으로 있던 회사의 사보에 실은 적이 있었다. 


“아... 역시. 음반도 많이 소장하고 계시고, 곳곳에 뭔가 지적인, 예술가의 감각이 엿보여서 굉장히 흥미로왔습니다. 실은, 저도 원래는 젊은 선생님처럼 비평가가 되는 게 꿈이었었습니다... 아, 그럼 업계 사람들도 굉장히 많이 만나시겠습니다. 뭐 매니저들이라던가, 기획사 관계자들, 아 직접 가수들도 만나고 그러십니까?” 

 

너무 깊게 이야기를 끌어가면 안 되었다. 


“뭐, 종종 보긴 합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이제 면대면으로 작업하는 시대는 아니라서요. 주로 이메일로 업무를 의논하고, 저도 대체로 인터넷 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편이어서요.”


“아, 그렇군요. 제가 잘 몰라서.”

“하하, 네 뭐 잘 모르실 수 밖에 없으시겠죠.”

“네, 잘 모릅니다.”

“그러시겠군요.”


루이 암스트롱이 코코넛 섬에 대한 찬가를 부르고 있는 와중에도 나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이래서 사람은 죄를 짓고 살면 안 돼. 


“암스트롱은 역시 보컬보다는 트럼펫 아닙니까?”


“물론입니다.”


이 음반에서 트럼펫을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 루이 본인이었다는 것은 후임 기사를 통해 처음 알았다. 다행히 순발력만은 타고난 나였다. 점점 대화가 불편해졌다. 화이트 칼라인 내가 블루 칼라인 당신과 대화를 하는 건 여기까지만이라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오늘까지 원고를 보내야 할 게 있어서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아 네, 그럼 어서. 아,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 음반들을 좀 봐도 괜찮습니까?”


후임 기사가 벽 선반에 가지런히 진열된 씨디 음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마음껏 보세요.”


집필실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대기모드 중인 맥북의 화면을 복원하고 페이스북에 쓰던 글을 이어서 쓰기 시작했다. 더 이상 후임 기사가 내게 질문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썼다가 지웠다. 


“저 이것 좀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굉장히 좋아하던 건데... 반가워서요.”


그가 손에 든 음반은 비틀즈의 <러버 소울>이었다. 노르웨이의 숲을 듣고 싶은 것일까. 나는  가벼운 목례로 답했다. 후임 기사가 함박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그는 씨디를 어디에 넣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씨디를 오디오와 연결된 플레이어에 걸어주고 플레이를 눌렀다. “죄송합니다만, 다음 곡으로 넘어가려면 어떻게 하죠?” 알려주었다. 후임 기사는 정중히 인사를 하더니, 거침 없이 트랙을 넘기는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는 ‘인 마이 라이프’를 선택했다. 



2013. 3. 1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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