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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비틀즈, 기억하고 있습니까 1

멀고느린구름 2013. 3. 10. 09:13


비틀즈, 기억하고 있습니까




  나는 신경질이 나 있었다. 분명히 11시까지 오기로 한 가스보일러 설치기사가 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11시 이후에 약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주말에 외출해서 사람을 만났던 것이 재작년 겨울인가 그랬다. 아무려나 내가 유일하게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끔 허락된 시간을 한낱 가스보일러 설치기사가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는 점이 괘씸했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 만나게 되면 한껏 모욕을 해주리라 다짐했다. 


  오기로 한 11시에서 벌써 34분이나 지났다. 전화 한 통 조차 없었다. 아마도 4,50대의 곤색 점퍼차림에 머리는 군대 상사를 연상케하는 부스스한 곱슬머리일 것으로 예상되는 중년의 남자에게 어떻게 하면 모욕을 선사할 수 있을까. “이 업체는 정말 훌륭하군요, 손님의 인내심까지 키워주니까요.” 약하다. “이래서 중소기업은 발전을 못하는 거 같네요.” 좀 품위가 없다. “제가 분명 11시에 오셔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참 대단하시네요. 덕분에 면접 시험에 가질 못했네요. 뭐 어차피 그닥 좋은 회사는 아니었겠죠.” 이게 괜찮다고 생각되었다. 사회적인 맥락과도 잘 연결되고 상대방의 잘못도 상당히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흡족했다. 


  문득 집 안에 어제 먹은 짜파게티 냄새가 가득하다는 게 느껴졌다. 곤란하다. 짜파게티 냄새가 진동하는 집에 혼자 사는 젊은 남자의 충고를 진심으로 아프게 받아들일 중년 남자는 없었다. 귀찮았지만 하는 수 없이 찬장에서 페이퍼 드립 도구들을 주섬주섬 꺼내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갑자기 설치인이 들이닥치는 쪽이 곤란해졌다. 기왕 늦은 김에 좀 더 늦기를 기도했다. 10분만 더 늦으면 족했다. 원두를 케냐로 할지 콜롬비아로 할지 고민하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향이 나는 케냐 쪽을 선택했다. 다행히도 설치인은 커피가 드리퍼에 온전히 담길 때까지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다. 커피를 잔에 담아 주방에 있는 원목 테이블 위로 옮겼다. 문을 열면 곧바로 보이는 자리였다. 음악도 틀었다. 이쪽은 굳이 의도한다기보다는 항상 행하고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씨디 플레이어에 건 앨범은 비틀즈의  <리볼버> 음반.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히얼, 데얼 앤 에브리웨어’가 나올 때 설치인이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왔으면 싶었다. 가장 최악의 타이밍은 바로 다음 트랙인 ‘옐로 서브마린’이 나올 때였다. 대중적인 취향으로 첫인상을 심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옐로 서브마린’이 나오는 중 이미 설치기사는 문밖에서 그 소리를 듣고 아, 이 집 사람은 이런 취향이군이라고 판단을 내리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내가 트랙을 앞으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설치인은 집 안에 들어서며 나의 얄팍하고 천박한 의도를 눈치 채고 피식 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의 완패였다.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무력하게 그가 마음대로 보일러실을 뜯어내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잠깐, 다시 생각해보니 곤색 점퍼차림의 상사계급인 설치기사가 비틀즈 따위를 추억하고 있을리 없지 않나. 케냐 커피향따위 그냥 고약한 냄새라고 생각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래저래 노력한 것들이 인간의 무지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여기니 허탈했다. 음악은 그만두자 싶었다. 마침 매카트니 경이 ‘히얼, 데얼 앤 에브리웨어’를 부르기 시작하며 분위기를 잡고 있었지만 커트. 쏘리 맥카트니 경. 그리고 초인종이 울렸다. 11시 52분이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2013. 3. 1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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