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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무의미한 밤 2

멀고느린구름 2013. 2. 22. 08:24



  자유로는 강변 북로로 이어졌다. 쌩쌩 달리던 차들이 갑자기 속력을 줄이기 시작하더니 종내는 하나 둘 멈춰섰다. 사고였다. 현장은 보이지 않았지만 300미터 앞 정도에서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도 들렸다. 옆에는 견인차들이 서서 먼저 가려고 경적을 울려대고 있었다. 욕을 하는 운전자도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 바람이었고 왼 팔에는 곰 문신이 있었다. 보통 용 문신만 봐온 탓에 흥미롭게 느껴져 유심히 쳐다보았더니 욕이 날아 들었다. 열어두었던 창을 황급히 올렸다. 곰은 심지어 차에서 내렸다. 모든 문을 황급히 잠궜다. 곰이 보조석의 문을 두들겨댔다. 그런데도 이현우는 한가롭게 며칠 전 가로수길에서 가진 지인들과의 회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듣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보조석 쪽 곰의 말은 더욱 듣고 싶지 않아 볼륨을 높였다. 앞 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해서 클러치를 조심스럽게 떼고 움직여가기 시작했다. 곰이 발로 차를 걷어 찼다. 차가 휘청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교통이 원활해졌다. 차들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덕분에 대로 한 가운데 주차되어 있던 곰의 견인차는 세상의 모든 욕을 혼자서 꿋꿋이 듣고 있는 중이었다. 곰이 자기 차로 돌아가는 것을 백미러로 확인했다. 


  300미터 정도를 달려간 것 같으데도 사고 현장은 확인할 수 없었다. 흔적도 없었다. 핏자국이라든지, 깨어진 유리 파편 같은 것, 혹은 떨어져 나온 운전석의 문짝 같은 것도 없었다. 차들은 무표정하게 사고가 일어났을 공간을 지나쳐 갔다. 가로수길에 대한 소회를 밝히는 것을 마친 디제이는 새로운 음악을 선곡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곡이었다. 채널을 바꾸려다 옆에서 빛의 속도로 달려오던 차와 충돌할 뻔했다. 채널을 바꾸는 것을 포기했다. 김동률의 벽을 결국 무방비 상태에서 듣게 되었다. 어릴 적 짝사랑하던 여자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연인을 대하 듯이 대해준 날이 있었다. 오늘이야 말로 고백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해서 잔뜩 꿈에 부풀었었다. 그런데 여자아이에게 벽이 포함된 김동률의 2집을 선물 받고 보기 좋게 차이고 말았다. 절교 선물로서의 하루였던 것이다. 김동률도 벽이라는 곡도 좋아했지만 노래를 듣고 있으면 지나치게 선명하게 그날 밤 여자아이와 헤어지던 양재역 벤치의 풍경이 떠올라 괴로웠다. 


  월드컵 경기장 안내표지를 지나자 한강공원 표지가 보였다. 그리로 차를 몰았다. 차선 변경을 하려 할 때마다 번번이 빛의 속도로 달려오는 차들이 있어 곤욕을 치뤘다. 가까스로 차선을 바꿔 탔는데, 이번에는 잘못 타서 한강공원으로 들어가는 샛길을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조금 더 가니 다시 월드컵 경기장과 한강공원이 동시에 표기된 표지판이 보였다. 도넛 같은 고가도로를 돌고 몇몇 익숙한 거리를 지나 한강공원 쪽으로 들어섰다. 출입구에 있던 차단기는 사람이 없는데도 자동으로 올라가고 내려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김동률의 벽을 괴롭게 듣고 있는 자동차의 차례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려서 뒤따라 오던 차가 경적을 1회 울렸다. 뭐 덕분에 느긋하게 라디오 채널을 바꿀 수 있었다. 전형적인 여성 심야 디제이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채널 조정 버튼에서 손을 떼자 차단기가 출입을 허가했다. 묘한 인과관계였다. 다행히 2회 째의 경적은 듣지 않고 한강공원으로의 진입에 성공했다. 주차장은 일요일의 운동장처럼 한가해서 대각선으로 아무렇게나 주차를 해버렸다. 심야 디제이의 목소리는 신원 확인을 하기도 전에 시동과 함께 꺼져버렸다. 차 문을 열고 나오자 강과 밤이 섞인 냄새가 확 끼쳐왔다. 모래 바닥의 질감도 좋았다. 문을 잠그고 목적지 없이 걷기 시작했다. 




2013. 2. 2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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