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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사랑의 트위스트

멀고느린구름 2012. 1. 9. 07:33


사랑의 트위스트



  문자 메시지를 열어보니 이번에도 서류모집에서 탈락이었다. 분명 작년 가을에 40번째 입사 서류를 작성했다. 지금은 1월이고 그동안 꾸준히 자소서따위를 작성해 왔다. 어느 순간부터 횟수를 헤아리지 않게 되었다. 수 천명에 달하는 응모생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거는 수고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회사측의 입장도 이해한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쁜 것만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기계적으로 자기소개서를 쓰고, 입사원서의 빈칸을 채워나가게 되었다. 적어도 10번째까지는 이렇지 않았다. 물론 5번째나 6번째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 아, 혹자에게는 무척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 내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65번째를 채우는 일이었다. 그런 극단적인 목표를 잡게 된 데에는 당연히 타당한 이유가 있다. 직장을 구한 친구들의 조언을 듣거나 취업가이드북 같은 것을 읽어보면 대체로 60 ~ 70번째 사이에서 구직을 하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구간에서 가장 공평한 65를 목표로 삼았다. 제3자가 무명의 인터넷 신문 한 귀퉁이에서 ‘요즘 젊은이들의 맹목적인 원서쓰기 경쟁'이라는 제하의 글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접한다면 혀를 끌끌 찰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좋다. 세상의 아무런 제3자도 나를 취직시켜주지는 않으니까. 


  30분에 1대를 배차시켜두었다는 마을버스는 매번 제 시간에 오지 않았다. 그간 기다릴 때마다 남몰래 시간을 측정해보았는데 대체로 40분에서 43분 정도 꼴로 기다렸다. 몇 차례 기사에게 항의도 해보고, 혜성운수라고 하는 사측에도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바뀌지 않았다. 그래도 사측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 이름은 혜성인데 왜 버스는 한 번도 혜성처럼 등장하질 않습니까.”라고 항의한 것은 내가 생각해도 괜찮았다. 사측에게 “혜성이 어디 자주 떨어집디까.”라는 쿨한 답변을 듣긴 했지만 말이다. 


  외투를 여며도 바람이 쑥쑥 들어왔다. 스마트폰의 날씨 알림 어플은 영하 10도를 알리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43분을 넘어 44분에 도달할 참이었다. 기사에게 단단히 항의를 하고 말리라 다짐했다. 주위에 같이 기다리고 선 사람들도 휴대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하고 무언가 투덜거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얼마 전에 와서 고작 5분 정도밖에 기다리지 않은 이도 있었다. 그건 좀 아니다 싶기도 했지만 이런 순간에는 연대가 필요했다. 정류장에는 나를 포함해 6명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필시 나와 같은 87번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목 부위에 북실북실한 털이 달린 진홍빛 코트를 입은 뽀글파마 머리의 아주머니는 거의 매일 마주쳤다. 마치 유니폼처럼 매번 같은 옷이어서 기억하기가 편리했다. 엠시엠 브랜드의 백을 들고 다니는 내 또래의 20대 여성도 자주 보는 이였다. 피부가 하얗고 얼굴이 미인형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이끌리곤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항상 내가 하차하는 곳 바로 앞 정거장에서 내렸다. 언젠가 한 번쯤은 같이 따라 내려서 어디 사는지 정도는 알아봐둘까 라고 생각한 것이 벌써 5개월이었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항상 2인석 좌석에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은근슬쩍 그 옆자리에 앉아 말이라도 걸어볼까 싶었으나, 1년을 타는 동안 이 버스는 단 한 번도 만원이 되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빈 좌석이 넘쳐났기 때문에 그녀의 옆에 앉는 일은 ‘굳이'라는 조사를 붙이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나머지 3명은 처음 보는 남자들이었다. 70대로 추정되는 지팡이에 의지해 서 있는 할아버지와 50대로 추정되는 점퍼차림의 아저씨, 초등학생으로 추정되는 노스페이스 패딩을 입은 꼬마. 함께 선 5명에게 모종의 유대감을 느끼는 사이 버스가 왔다. 오늘은 단단히 항의를 하리라 마음을 벼르며 버스에 올랐다. 


“어이구,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손님. 하하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올 한 해 행복한 일만 있으세요~ 어서 올라오세요. 난방 팍팍 틀어놨습니다아~하하하.”


  전의상실. 새로온 기사 분인지, 아님 새해를 새롭게 맞이하기로 다짐한 구 기사분인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렇게 서글서글하게 인사를 해오는 사람에게 새해 벽두부터 항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얌전히 기사 바로 뒷좌석에 앉았다. 뒤를 따라 오르는 사람들도 기사의 급방긋 인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사는 쉬지도 않고 계속 인사를 했다. 심지어 멘트를 조금씩 바꿔가면서. 


“어이구, 얼마나 기다리셨어요? 많이 추우셨죠 손님. 새해 복 가득 받으시고, 가정에 두루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이야, 날씨 정말 춥죠? 어서어서 들어오세요. 저희 버스는 새해 복이 가득 찬 버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오~!”


이런 식이었다. 기사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된장국 같은 푸근함이 담겨 있었다. 과하게 들뜨지 않으면서도 거북하게 가라앉지 않았다. 가장 듣기 좋은 목소리란 주제로 설문조사를 한다면 5위 안에는 들지 않을까 싶은 정감이 가는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다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오늘도 저희 혜성운수를 이용해주신 승객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혜성같이 오질 않아서 기분 나쁘셨죠? 죄송합니다. 하지만 오늘이 혜성처럼 멋진 운행이 될 것을 여러분께 약속 드립니다! 올해는 60년만에 찾아온 흑룡의 해라죠. 올해가 왜 흑룡인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올해가 한자로 임진년인데. 여기 임이라는 글자가 풍수지리상에서 물 수자에 해당이 된답니다. 전통적으로 물은 검은색으로 표시를 한다네요. 그리고 임진년의 진이 십이간지로 따져서 용이 됩니다. 그래서 올해가 흑룡의 해죠. 흑룡의 해에는 국운에 큰 이변이 되는 일들이 있었다고 하네요. 대표적으로 임진왜란이 있겠습니다만 올해는 우리 승객 여러분과 함께 국운이 융성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오늘 운행을 시작하겠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자, 출발합니다. 노약자분들은 손잡이 꼭 잡으세요오~”


대단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잠점 은퇴한 강호동 씨 대신 토크쇼 한 자리를 꿰차도 손색이 없을 듯한 언변이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도로가 조금 정체되는가 싶으면 어김없이 기사의 토크쇼가 이어졌다. 


“제가 오늘 아침 기사를 하나 봤습니다. 세계 경제 순위로 치면 140위 정도로 최빈국에 속하는 방글라데시나 라오스 같은 나라가 행복지수는 매번 1위라는 거였어요. 거 참 신기하죠? 저는 그 기살 보면서 아, 역시 사람이 행복하게 산다는 게 꼭 돈이 필요한 건 아니다. 그런 생각을 다시했습니다. 거 돈 몇 푼 모자라면, 남들보다 좀 덜 가지고 있으면 어떻습니까. 사람이 웃을 수 있는 건 다 공평하게 타고 난 거 아니에요. 돈 많은 사람 중에 평생 제대로 못 웃고 사는 사람, 제가 마않이 봤습니다. 행복, 고거 별거 아닙니다. 일단 웃으세요. 그럼 행복해집니다. 소문만복래라고 하잖아요. 저는 우리나라가 올해 경제 순위보다 행복지수가 껑충 뛰어오르는 나라가 되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안 그러세요. 허허허허. 자, 다음 정거장은 우리빌라 1동입니다. 내리실 분 준비하세요. 내릴 시간 충분하시니까 운행할 때 위험하게 일어나지 마시고요~”


4월 총선 때 이분을 국회로 보내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고 말았다. 단단히 항의를 하자고 별렀던 마음은 무뎌질대로 무뎌져서 물컹물컹해져 있었다. 잔뜩 누그러진 마음가로 잔잔한 파도가 밀려왔다. 여름의 바닷물 같은 따뜻한 온수의 파도였다. 기사의 호언대로 버스 안은 최대치로 난방이 가동되고 있어서 까무룩 잠이 올 정도였다. 마치 안방에서 따뜻한 담요를 덮고 있는 기분이랄까. 나는 어느 새 기사의 다음 멘트를 고대하고 있었다. 


“요즘 청년 여러분, 고생이 많으시죠?”


센스쟁이. 방금 앞 정거장에서 20대 중반 정도의 청년 두 세명이 추가로 승차한 것을 감안한 진행이었다. 


“요즘 뭐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런 말도 많이 하는데, 어디 아프니까 청춘이랍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 행복해야 청춘이다. 청춘이 행복해야지 아프면 씁니까. 거 청춘에는 뜨겁게 사랑도 하고, 꽃피는 데로 놀러도 댕기고, 열정적으로 꿈도 꿔보고, 세상을 뒤집을 생각도 해보고 그래야 청춘이지. 허구헌날 아파가지고 골방에 쳐박혀 있고, 도서관이니 학원이니 그런데 붙들려 있어가지고 그게 무신 청춘이랍니까. 고게 다 저희 세대가 못나가지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좀 더 먼저 산 사람으로서다 참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미안합니다이. 그래도 이 아저씨들도 열심히 살아온 인생 아니겠습니까. 젊을 때 거 독재랑도 싸워보고, 거리에서 피도 흘려보고, 눈물도 쏫고 다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사람이 산 다는 거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나아지겠지, 나아지겠지 그런 말을 계속 중얼거리면서 사는 거 고게 인생 아닙니까. 머 제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은 안 뵈겠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살다보니 진짜 쪼금씩 나아집디다. 뭐 진짜 대단한 건 아니지만요. 포기하지 않고 걷다보면 조금씩은 인생이 나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정도도 못하도록 인생이 틀려먹은 건 아니니까요. 학생들, 젊은이들 힘내시요. 어깨 펴고 다니세요. 연애 많이 하고, 많이 웃고, 공부는 쪼매만 해요 하하하. 뭐 버스 운전수가 하는 말이 대단한 충고로는 안 들리겠지만요. 그런 의미로다 제가 여러분께 힘내라고 노래 한 곡 띄워 드리겠습니다. 캬 이 노래 정말 명곡이에요. 저는 이 노래 들으면서 제 학창시절 생각 많이 합니다. 그럼 절로 가슴이 뜨근해지고 웃음이 나요. 행복해져요. 우리 승객 여러분도 이 노래 들으면서 행복해지시길 빕니다. 설운도가 부릅니다. 사랑의 트위스트.”


샹하이 샹하이 샹하이 트위스트 추면서

난생 처음 그녀를 알았고

샹하이 샹하이 샹하이 트위스트 추면서

온 동네를 주름잡았던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

잊지 못할 사랑의 트위스트~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세상에 ‘사랑의 트위스트’를 들으면서 눈물을 쏟다니. 보드랍고 뭉클한 공이 가슴 속에서 빙글빙글 돌며 온기를 퍼뜨리는 기분이었다. 행복했다. 서류모집 탈락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버스 안은 엄마의 품속처럼 따스한 온기가 가득했다. 버스에 탄 모두가 그런 기분일 것이다.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모두 너무 행복하시죠? 라고 동의를 구하고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승객 모두가 이어폰을 낀 채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곳을 잃은 사랑의 트위스트는 창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2012. 1. 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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