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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달에서 4(완결)

멀고느린구름 2011. 12. 31. 11:42





4(완결)



   갈게, 나는 웅크리고 앉은 K를 등지고 파란 문으로 걷는다. K는 엷게 흐느낀다. 우스운 눈물이다. K는 어차피 나를 안지도 않을 것이면서, 나를 잃을 것을 염려한다. 내가 갖기는 싫고, 남주기는 또 아깝다는 그런 흔해빠진 마음이다. 나는 K에게 그 정도일 뿐이다. 소유욕의 강도에 따라 존재의 가치를 평가 당하는 그런 정도의 사람이다. 고개를 돌린다. K는 그대로다. 화가 난다. 그에게 욕을 퍼붓고 싶다. 그러기에 이곳은 적절한 장소가 아니다. 달의 뒷편에서 누군가에게 욕을 퍼부은 기억을 간직하고 사는 인생은 얼마나 초라하겠는가. 잠깐, 나는 더 살아가는 것일까. 저 문 뒤에서 더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K의 염려대로 나의 생은 여기서 끝이 나는 걸까. 


  나는 Y를 사랑했었다. 오랜 열병이었다. 고1 시절, 입학식이 끝나고 낯선 교실에 앉아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이 머쓱해져 복도로 나왔다. 복도 창을 통해 터진 하늘을 올려보다 맞은편 건물 복도 창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Y였다. 그리고 우리는 음악감상부에서 다시 만났다. 사랑이 싹 트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로맨틱한 첫 마주침, 우연한 두 번째 만남, 그리고 감미로운 음악이 있었으니까. Y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은 커녕 좋아한다는 고백조차 들은 적은 없었다. 심지어 우리는 학교 외의 장소에서는 서로 만난 적도 없었다. 방학 때도 단 한 번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는 3년 내내 수업이 끝난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에 음악감상부에서 함께 음악을 들었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을 뿐이다. Y와 내가 첫 스킨십을 한 것은 졸업식이었다. 우리는 헤어지면서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안녕, 잘 지내. 


그것이 우리가 한 작별 인사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 인사에는 진시황의 기마병유적보다 깊고 넓은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Y는 학교의 기대와 달리 S대에 합격하지 못했고, 재수생이 되었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나는 수도권의 대학에 합격해 상경하게 되어서 그후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대학생이 된 나는 한 번의 짧은 연애를 거쳐 K와 만났다. 그리고 7년이었다. 


대학생이 되고 다른 이를 만나고 또 K를 만나는 동안 Y를 떠올린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Y를 사랑했었다고 확신한다. Y를 사랑했던 그 시절이 행복했었다고 믿는다. 첫 키스, 첫 관계도 모두 Y의 것이 아니었다. 허나 분명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그 자체로 행복을 느꼈던 것은 Y가 처음이었고, 또 끝이었다고 여긴다.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분한 논리들이 있다. 하지만 대개 그 논리들은 사랑의 감각과는 큰 관련이 없다. 오직 ‘아, 이건 사랑이야.’라고 느낄 때의 그 감각만이 살아있는 사랑의 실체일 뿐이다. 사랑은 자연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을 설명하는 일은 과학자나 철학자의 몫이지 사랑하는 이들의 몫은 아닌 것이다.   


Y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다만 Y와의 사랑이 우리의 졸업과 동시에 완결된 것일 따름이었다. 완결된 것은 아름답다. 모든 그림이나 음악, 글은 그 작가가 완결이라고 선포한 순간 아름다움의 숨결이 불어넣어지는 것이다. Y와의 사랑에 미련은 없었다. 우리가 여느 연인들처럼 주말에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고, 방학 때도 만났다면, 그리고 졸업을 한 후에도 계속 연락을 이어갔다면 우리는 아마 서로에게 첫 키스가 될 키스를 하고, 첫 관계의 기억도 함께 공유했으리라. 그렇지만 우리의 사랑은 완결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덧칠을 하고, 불협화음을 냈을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지루한 소설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마치 K와의 관계처럼. 


이제 얼마의 시간이 더 남은 걸까. 10분? 5분? 아니면 몇 초밖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파란 문으로부터 50미터, K로부터 50미터의 지점에 서 있다. Y의 모습이 보인다. 담담하게 나를 바라보며 서있다. K는 여전히 웅크리고 앉은 자세다. K가 다시 한 번 잡으러 와주었으면 싶으다. 오지 않는다. 여기서 K를 부르면 그에게 들릴까. 내 목소리가 그의 마음에서부터 울려퍼질까. 몇 일이 더 지나면 나의 20대가 끝난다. 파란 문으로 들어가면 끝나는 건 20대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두렵다. 그래도 이쪽에는 Y가 있다. 완결된 아름다운 사랑이 있다. 저쪽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이 결국 계속 살아가게 되는 것은 어쩌면 생에 대한 호기심 탓이 아닐까. 나는 내 생에 대한 궁금증이 남아 있는가. 묻는다. 어느 쪽이든 50미터다. 얼마의 시간이 더 남은 걸까. 알 수 없다. 행복은 과거 속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불확실한 내일로 나아가려 하는 것인가. 알 수 없다. 나는 가던 길을 되돌아 걷는다. Y와 파란문이 사라진다. 달은 해의 그림자에서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2011. 12. 31. 멀고느린구름. 






*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스위트피의' moonrise'를 들었습니다. 두 사람이 개기월식의 시간에 달에 갇힌다는 모티브는 만화가 야자와 아이의 걸작 <하현의 달>을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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