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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e bye Memorial
Code-1. Hardboiled Christmas
“눈이라구?”
케이시는 E-Book에서 눈이라는 물질을 출력해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맞아. 지구에서는 예전에 겨울이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솜뭉치 같은 게 있었지. 아쉽게도 화성에는 눈이 오지 않았다. 화성에 건설된 이 스페이스 네이션 ‘지구의 추억’ 은 지구와 비슷한 형상으로 제작되었지만 계절의 변화까지 기대할 순 없는 것이다. 덕분에 이곳은 세월에 관계없이 늘 초여름 같이 따사롭다.
“이런 거 보면 가끔씩 지구가 그립지 않아 클레어?”
“글쎄... 그리운가?”
“넌 여전히 낭만이 없구나.”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움 따위 별 필요 없는 감정이지 않은가. 왜들 그렇게 소모적인 것에 신경 쓰는지. 그리움 같은 게 아니라도 생각해야 될 게 많다. 일단 스펨메일처럼 우르르 쌓인 결제 파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나는 가정용 청소로봇을 개발하는 주식회사 ‘클리어’의 홍보부 부장으로 있다. 물론 원대한 꿈을 가지고 이 회상에 입사했다. 사실은 아무 생각 없었지만. 그래도 이곳에 취직한 것은 다행이다. 지구 붕괴 직전에 화성에 사옥과 공장을 지은 얼마 되지 않은 기업 중의 하나이니까. 갑작스런 지구의 붕괴로 인해 이곳 화성으로 이주해 살던 인류와 관광객들만이 생존하는 행운을 얻었다. 아, 지구의 높으신 정치 리더들도 우주선을 타고 탈출했음은 당연하다. 어쨌든 나는 여러 가지로 행운아다. 이렇게 살아남았고, 이렇게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이렇게 안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행운을 모르고 불평을 늘어놓는 인간들은 정말이지 역겹다.
‘클리어봇 XP-10 모델. 방바닥에 바퀴벌레가 남긴 쿼크의 흔적까지 쓸어버린다! -보낸 이. 케이시-’
삭제. 불평을 늘어놓는 인간들 중 쓸만한 머리를 가진 인간을 본적이 없다.
이제 몇 일 뒤면 크리스마스였다. 모니터 속에서 흘러나오는 완전 붕괴된 줄 알았던 지구가 서서히 재생하고 있다는 앵커의 하드보일드한 목소리. 희망은 아주 지겨운 것인가 보다. 화이트크리스마스 꿈꾸는 이들도 지겨운 건 마찬가지. 이 유리관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기대할 걸 기대해야지 않겠는가. 이루지 못할 꿈 따위 빨리 접어버리는 게 낫다.
“에스프레소.”
나는 에스프레소 기계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뽑았다. 혀끝부터 감겨들어오는 지독한 쓴 맛. 지구에서 대학을 다닐 때 유서 깊다는 커피 하우스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모든 공정을 기계 없이 손으로 처리했다. 그 과정에 참여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렇게 나온 커피는 무던히도 들이켰었다. 지독한 쓴맛. 그때는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있는 작자들은 정말 지독한 인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30대 후반이 되면 누구나 지독해진다는 걸 몰랐다.
얼마 전까지 환했던 밖이 어두워졌다. ‘지구의 추억’ 중앙 조명이 꺼진 것이다. 야행성인 인간들은 드라이브를 즐기거나 클럽에 갈 것이고, 나 같이 규칙적인 아침형 인간은 일찍 자야 한다.
“오프.”
방 안의 불이 꺼졌다. 말하기가 귀찮은 나 같은 인간들에게 가장 짜증나는 것이 있었다. 모든 가전제품들이 음성인식으로 작동한다는 것. 편리함은 결코 보편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혜정아, 면접은 잘 봤어?”
“몰라, 이상한 거만 잔뜩 물어서. 한전 들어가는데 꼭 인생관이 필요한가? 지들이 내 인생을 알아서 우짤라고.”
“그러게.”
K대의 풍경은 겨울 햇살에 은은히 물다. ‘미래사회와 조직’ 이라는 수업을 같이 듣는 창혁과 나는 굳게 닫힌 강의실 문을 바라보며 좌담회를 열고 있는 중이다. 주위에 불평을 늘어놓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다 말다 한다. 나는 불평하기도 귀찮아 가만히 강의실 문만 바라본다. 밤새 취업준비를 했더니 자꾸 까막까막 잠이 온다. 창혁은 그런 걸 전혀 모른다는 양 계속 뭐라고 조알댄다.
“그러니까 너무 급하게 그러지 말고, 천천히 맘 편히 생각해. 넌 꿈같은 거 없어? 꼭 해보고 싶다 싶은 그런 일.”
‘그러니까’ 이전의 얘기가 기억이 안 난다. 결국 근거 없는 속편한 소리로 밖에 인식이 되지 않는다.
“난 급하단 말야! 내년 이면 벌써 스물넷인데 빨리 취직해야지.”
“스물넷이면 젋잖아 아직.”
웃기는 소리. 웃기는 소리다. 허나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교수님은 오지 않을 모양이다. 벤치에서 일어난다. 창혁이 따라 일어난다.
“가려고? 어디?”
“원서 써야지. 이력서랑 자기소개서랑 기타 등등”
“이번엔 어디?”
“클리어라고 청소기 만드는 회사. 판매직원이라도 할까봐.”
내 대사를 끝내고 니 시야가 흐려지며 그의 모습이 흐리마리 해진다. 이름이 뭐라고? 차.......
꿈을 꿨다. 매번 같은 꿈이었다. 인지심리 센터라도 찾아가봐야 할 듯 했다. 그냥 해본 소리였다. 오늘은 업무 차 아메리카 시티의 로봇공학 연구소에 가보아야 했다. 아시모프 박사에게 새로 개발된 클리어봇 XP-10T의 샘플을 받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아시모프 박사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 벌써 정오였다. 방 안에는 쩐지 음침한 공기. 올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런 사람에게 펌프프라이밍을 맡길 수밖에 없는 회사가 참 불쌍했다. 원래 아시모프 박사는 우리 기업의 기술개발부 소속의 A급 과학자들의 조수였다. 지구붕괴 조짐이 발견되었을 때 정부의 요청으로 A급 과학자들이 지구로 갔고 지구붕괴의 소용돌이에 모두 휩쓸리고 말았다. 조수였던 그는 늦잠을 잤던 게 행운이었다. 아시모프 박사는 생긴 게 조금 얼빵하고, 행동이 느리고, 약간 변태끼가 있으며, 잠이 많고, 자폐적 다혈질에다, 지저분하다는 사소한 결점들을 빼면 괜찮은 과학자이자 기술자였다.
“클레어씨 오늘은 더 섹시해 보이는데 오늘 밤 어때요?”
소심하고 음습한 목소리로 진담 같은 농을 걸어오는 그, 나는 많이 겪어봤으므로 여러 가지 대응책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당신 걸로 된장 찍어 먹을 반찬거리라도 되겠어요? 샘플은 다 끝났나요?”
그는 만족한 듯 빙긋 웃는다. 변태가 맞다.
“그럼요. 이쪽입니다.”
아시모프 박사는 지하계단을 가리켰다. 좀 거림직 했지만 어쨌든 업무는 마쳐야 했다. 지하에는 구형 컴퓨터와 자동차 엔진 같은 것들. 그리고 정체불명의 쇳덩어리들이 가득 너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로봇이 있었다.
“바로 이 아입니다. 스잔나, 인사드려요. 이쪽은 클레어씨예요.”
로봇은 인사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인공지능 로봇을 주문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AI 프로그래밍을 전공하지 않았다. 클리어봇은 단지 10의 제곱 단위의 전자기파까지 감지하여 성분을 분석해내는 민감한 센서와 단순연산의 CPU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었다. 로봇이 인사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시모프 박사는 ‘스잔나 잘했어’ 하며 로봇을 쓰다듬었다. 로봇의 뒤통수에 명백히 ‘클리어봇 XP-10T’ 라고 써있지만, 그는 계속 로봇을 스잔나라고 불렀다. 클리어봇 XP-1T 때부터 변함없이.
XP-10T를 뒷좌석에 싣고 시동을 걸어다. 백미러를 보았다. 아시모프 박사가 계속 손을 흔들며 뭐라고 지껄였다. 창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고
“뭐라고요?”
“스잔나! 잘가아! 꼭 돌아와야해애~! 흐흐흑...”
빌어먹을 변태새끼. 나는 엑셀을 세차게 밟았다. 아시모프 박사의 흐느낌은 도플러 효과도
없이 사라졌다. 시 경계선에서 잉글랜드 시티로 핸들을 꺾었다. 리버풀레코드에서 비틀즈의 새로운 기념음반이 1000부 한정으로 나온 것이었다. 내게 단 한 가지 그리움의 대상이 있다면 그건 비틀즈였다. 아니다. 그러면 유키 구라모토나 죠지 윈스턴이 커피를 엎지를 일이다. 하지만 어차피 그들이 그리운 게 아니라, 그들의 음악이 그리운 것뿐이다. 그런 건 사서 듣거나 일정액을 내고 다운받으면 그만이다.
“비틀즈 사러 온 거야?”
“아, 응. 너도?”
만나기 싫은 케이시였다. 쓸데없이 낭만적인 남자는 딱 질색이다.
“아아, 너도 꽤 로맨틱한 구석이 있구나아.”
로맨틱? 비틀즈를 로맨스로 추억하는 작자와 나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나는 비틀즈의 철학에 동조할 뿐이었다. 유키와 죠지에 대해서도 해명하자면 잠들기 전에 듣는 명상음악으로서 그들의 역할을 규정할 뿐이었다.
“아아.”
물론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귀찮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아뿔싸. 케이시의 센서는 과학혁명 이전의 것이었다.
“이야아~ 그렇단 말이지. 다시 봤는데에. 우리 어디서 술이나 한 잔 하면서 비틀즈를 추억해 볼까 그럼?”
절대 싫다. 케이시는 비틀즈를 안주거리 삼아 요새 코리아 시티에까지 붐인 풀뿌리 시민단체의 문제점이나, 무정부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지구의 추억’ 행정부의 부활을 토로하며, 붕괴 직전 지구를 탈출한 모 정치인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표명할 것이 분명했다. 공작이 아무리 화려한 낭만의 꼬리를 흔들어도 그건 고작 수컷의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
“아, 미안해. 아직 일이 다 안 끝났거든. XP-10T 샘플로 광고 기획 아웃라인을 정하는 걸 아직 다 못했어. 재택근무 기간이래도 할 일은 마쳐야지 않겠어?”
나는 재빨리 발길을 돌려 리버풀을 나왔다. 논스톱으로 차에 올랐다. 엑셀레이터. 차는 잉글랜드 시티의 도로를 ‘Help!’를 외치듯 빠져나갔다.
심한 두통이 일었다. 집에 와서 XP-10T를 부엌에 놓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비틀즈 기념음반을 사오지 않았음을. 나의 미련한 영혼을 문질러버리고 싶다.
“모니터 온. 뮤직. 비틀즈. 러버(Rubber) 소울.”
‘드라이브 마이 카’ 가 흘러나오며 모니터에는 주사 맞고 반쯤 맛이 간 폴 메카트니의 얼굴이 지난다. 약 먹고도 안 되는 놈도 있으니, 비틀즈는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괜찮다. 이런 생각을 한데도 국가 보안법 위반 마냥 잡혀가진 않았다. 과학기술이 발달했다고 해서 생각까지 해킹 당하지는 않았다. 20세기의 사람들은 과학을 너무 대단하게 보았던 것 같다. 결국 과학이 알아낸 거라고는 ‘모르겠다’ 뿐인데도 말이다.
“그래, 너도 위대한 과학의 산물이지? 어디 좀 볼까? 클리어봇 온!”
로봇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명령어를 말했다. 마찬가지. 둥그렇던 통증이 머리의 한 곳으로 쏠리는 듯 했다. 우뇌. 어째서 항상 우뇌로 고통이 집중 되는 걸까. 감상적인 생각이라곤 전혀 하고 있지 않은데. 통증이 더금더금 더해졌다. 침대로 가 누웠다. 어느 새 노래가 ‘노르웨이의 숲’ 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땐 나 혼자였어. 그 새는 날아가 버린 거야(And when I awoke. I was alone, This bird had flown).
“모니터 오프! 오프!”
모니터는 꺼졌지만 방안의 불은 그대로였다. 명령어 인식이 잘 안된 듯.
“오프! 오프! 오프!”
꺼졌다. 방안의 불도. 냉장고도. 가습기도. 공기 청정기도. 디지털시계도. 지닌 내 영혼도. 그때는 말 한마디로 바꿀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 보다는 말에 힘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자, 혜정아. 네가 좋아하는 거. 비틀즈 한정판이야.”
남산 타워의 벤치. 내 생일이기 때문에 온 것은 아니다. 그냥 왠지 어느 순간 눈 앞의 것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면, 미처 내가 못 본 것들에 얼마나 억울한 기분이 들까. 그런 생각이 든 것뿐이다. 일일이 가보긴 힘드니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보고 대충 다 본 셈으로 치는 것이다. 편리와 효율성. 그것만이 지구의 유일한 진리 아니던가. 인간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끙끙 짊어지고 태어난 것 아니겠는가. 비틀즈는 그런 것과 전혀 무관하다. 그건 창혁도 마찬가지다. 일하기도 바쁜 세상에 사랑을 곁들이기는 우리가 샴쌍동이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불가능하다. 멀고도 바람이 부는 이 길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차를 살 수 있는 자는 단 하나 분. 생각해 보라. 어리적의 운동회를. 이인삼각 보다는 100미터 달리기 쪽이 기록이 좋지 않은가. 100미터는 진지하고, 이인삼각은 코메디다. 어른들은 내게 인생은 진지한 거라고 말해주었다.
“넌 인생이 그렇게 쉬워 보여?”
“무슨 얘기야?”
“취직 안 해?”
창혁은 피식 웃는다. 나는 그의 그런 태도가 좋으면서 싫다. 야, 인생은 진지한 거라니까.
“혜정아, 전에도 말했듯이 내 꿈은 훌륭한 뮤지션이 되는 거야. 중학교 때 처음 비틀즈를 듣고 그렇게 다짐했어. 너 보기엔 그럴지 몰라도 나 우리 클럽에서 제일 인기 있는 기타리스트야. 내가 쓴 노래도 많이들 좋아해주고, 이 순간의 행복을 나는 소중히 하고파.”
“그래서 얼마 버는데? 누가 때려치우라니? 그냥 취미로 해. 직장 다니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잖아.”
“내가 하고 싶은 건, 혜정아. 내가 정말 마음을 다해 할 수 있는 건 기타를 치는 것 뿐야. 난 그게 제일 좋아.”
“어린 애는 정말 싫어.”
“......”
창혁은 손에 든 비틀즈 씨디를 만지작거린다. 나는 갑자기 암전 돼버릴 것 같은 서울의 야경을 바라본다. 그 깊숙한 거리의 사연 따위는 알 바 없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에 관심이 있지, 그 아름다움을 이루는 세세한 요소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것처럼.
“헤어지자 우리.”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케이블카 방향으로 내려간다. 창혁은 따라오지 않는다. 한정판 비틀즈 씨디는 앞으로 다시 구하기 힘들 것이다. 모든 지나간 사랑들처럼. 어제들처럼.
이번에는 좀 다른 꿈이었다. 매번 등장하는 남자의 이름은 항상 기억나지 않았다. 비틀즈 씨디를 못 구한 후유증이 꿈으로 구현된 것 같았다. 나도 참 단순한 인간이었다.
오늘은 재택근무 마지막 날이었다. 주 4일 근무 중 3일은 재택, 하루는 사무실 근무였다. 사무실 근무는 3일간의 재택근무에서 생각한 아이디어나 회의 안건 등을 토의하고 같이 뒤풀이를 하는 그런 용도였다. 5층짜리 회사건물도 1층의 회의실동을 빼고는 모두 직원들을 위한 편의시설, 운동시설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주로 2층에 있는 수영장과 3층에 있는 멀티플랙스 영화관에서 주말을 나곤 했다. 내일은 XP-10의 홍보에 대한 아이디어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나는 XP-10T에 대한 사용평가와 그에 따른 개선점, 홍보방안 등을 대략적으로 발표해야 했다. 그런데 아직 샘플을 가동도 못해보고 있으니. 후우. 괜한 한숨.
다시 아메리카 시티로 향했다. 뒷좌석의 XP-10T도 귀찮아하는 눈치였다. 내 생각뿐일 수도 있지만. 아시모프 박사의 집에 도착했을 때 문은 열려 있고 박사는 없었다. 그는 전혀 자기 노하우를 지키려는 노력을 않는 걸까. 안 그래도 타 기업에서 리버스엔지니어링을 통해 클리어봇과 유사한 청소로봇을 개발하기도 했었다. 지금이 OEM 방식의 시대이기 망정이지 대량생산시대였으면 우리 기업은 이렇게 오래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아시모프 박사를 긍정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가 죠셉 슘페터보다는 피카소 쪽의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XP-10T로까지 오면서 사실 아시모프가 이룬 기술의 진보는 별로 없다. (혁신이라는 표현을 굳이 쓸 필요도 없다.) 단지 그는 해를 더해갈 수록 다양해지는 로봇 디자인 패턴으로 주문자들을 만족시켜주는 것이었다. 그가 변태적인 건 역시 예술가형의 인간인 까닭일까. 모르겠다. 집 안으로 향했다. 음침한 공기는 여전했다. 지하로 내려갔다. 언제 봐도 청소로봇보다는 프랑켄슈타인 28호 따위가 만들어질 것 같은 곳이었다. 벽면 쪽으로 웬일인지 XP시리즈가 차례로 진열되어 있었다. 사무실 보급형으로 개발되다 수요가 적어 중단된 ME-0도 보였다. 그리고 벽면을 자세히 보니 희미하게 글씨 같은 게 보였다.
‘스잔나 사랑해.’
변태 영감 같으니. 이제는 드디어 로봇으로 넘어간 것인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시모프 박사.
“오, 이런 웬일이세요? 드디어 저랑 밤을 보낼 맘이 생겼나요?”
여전히 저질 농을 치고 있지만 뭔가 다급해 보였다.
“바쁘세요?”
“아. 네 좀 빨이 일이 있어서요. 아주 중요한. 일이 아주.”
아시모프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무언가를 분주하게 찾았다.
“저, 저기. 이번 XP-10T가 작동이 안되는데요. 키워드가 바뀐 건가요?”
“아, 여기 찾았다! 여기 있었군요. 그리운 사람.”
아시모프는 먼지가 들러붙은 사진을 들고서는 히죽히죽 웃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고는, 다시 방긋방긋 웃었다. 역시 변태다. 그나저나.
“저 박사님. 제 말 들으셨어요? 안 움직인다고요 로봇이!”
나는 소리를 질렀다. 아시모프는 그제야 좀 정신이 들었는지 내 쪽을 돌아봤다. 허나 사진을 흰 가운 안 주머니로 넣더니 당당히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서 있었다.
“저... 저기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왜 안 움직이는지. 간단한 AI를 넣은 것 말고는 전 모델과 다를게 없거든요.”
“AI요? 인공지능?!”
“한 번 저처럼 해봐요 그럼. 꼭 끌어안고 ‘사랑해요 스잔나’ 라고.”
“제가 당신인줄 아세요?”
아시모프는 담배연기 같이 미소 지었다.
“저는 이만 바빠서. 굿바이 클레어. 아니 혜정씨.”
혜정? 그랬지. 지구 붕괴 전의 내 이름이었다. 지구가 붕괴된 이후 화성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끔찍한 과거를 잊기 위해 모두 이름을 고친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 로봇을 움직여야 하는데. 아시모프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나는 옛 이름이 주는 야릇한 무게감을 느끼며 힘겹게 지하실을 빠져나와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도 내내 ‘혜정’ 이라는 이름이 낯설고 친숙하게 머리 속을 맴돌았다. 나에게 화성 이전의 기억은 결코 없었다. 없었다.
지난날, 나의 모든 괴로움은 사라진 것 같았지요. 그러나 지금 그 괴로움 다시 오는 것 같아요. 오, 난 지난날을 믿어요.(Yesterday, 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way. Now it looks as though they're here to stay. oh, I belive in yesterday.) 모니터 속에 폴과 존, 해리슨, 그리고 링고가 앳된 모습으로 노래와 연주를 하고 있다. 지구가 붕괴되기도 전에 죽은 사람들. 사람들은 왜 지나간 것들을 그리움이란 코 없는 그물로 붙잡아 두려할까. 결국 모두 빠져나가버릴 것을. 예전에 쓰던 이름 따위 지금 와서 추억해본들 무슨 소용이람. 난 매우 좋은 삶을 살고 있다. 안정된 직장, 안정된 보수, 안정된 인관관계. 더 이상 부러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나는 내 삶이 훌륭하다고 평가해왔다. 허전한 건 없었다. 정말 없었다. 젠장, 누구나 다 허전한 구석은 하나씩 있지 않냐. 그걸 꼭 채워야해? 그게 그렇게 의미 있냐고. 제길 이게 다 내일 케이시에게 들을 잔소리 때문이었다.
“뮤직 오프. 티비 온. 채널 07.”
재수없게도 뉴스.
“긴급속보입니다. 오늘 오후 6시 23분 경. 재생되고 있는 지구를 탐사하기 위해 출항한 우주선 프로미스호에서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아메리카시티의 로봇공학자로 알려진 아시모프씨가 단독으로 지구에 접근하다 지구로부터 날아온 괴운석에 부딪혀 사망했다는 소식입니다.”
가슴이 셔터 마냥 차르륵 내려앉았다. 그 변태 박사는 왜 아무것도 없는 지구에 가려했을까. 아무튼 그리운 게 있는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목숨을 걸 일이 있다는 게 나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지구... 지구라. 나에게도 ‘지구의 추억’이 있었던가. 클레어가 아니라 ‘남혜정’ 의 추억.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 맞아. 나는 쓰지 않는 옷장 밑 서랍을 열었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뒤엉켜 있었다. 모두 내가 ‘혜정’이란 이름을 쓸 때의 것들. 절대로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삼키고 있는 물건들. 나는 편지 한 장을 찾아냈다. 지구 붕괴 전 화성으로 출장발령을 받았던 날 아침에 집으로 도착한 편지였다. 내가 화성에 도착하고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아 지구가 붕괴되어 그 편지는 ‘혜정’ 이란 이름과 함께 서랍 속에 묻혔었다. 나는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다. 오래된 먼지가 봉인이 풀린 혼령처럼 피어올랐다.
사랑하는 혜정이에게
건강하지? 오랜만이야.
긴 말은 싫어하니까 짧게 전할게.
나 기타 치는 건 잠시 접고 취직하기로 했어.
지구에 있는 회사인데 내일부터 근무야.
나 너랑 헤어지고 많이 고민했는데...
역시 내게는 기타나 음악보다 네가 더 소중한 것 같아.
염치없는 말이지만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래, 눈이 오는 크리스마스라면 기적을 바랄 수도 있겠지?
눈이 오는 크리스마스에 우리 처음 만난 그곳에서 기다릴게.
아침부터 새벽까지 24시간 네 생각만 하면서.
사랑해 진심으로.
200X년 12월 21일
창혁이가
입 속으로 뜨겁고 짠 게 흘러들었다. 눈가를 자꾸 닦았다. 그래도 자꾸 흘러들었다. 어떻게 우는 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울음소리가 나지 않는다. TV에서는 앵커가 또다시 격앙된 목소리로 긴급속보를 전해왔다.
“아시모프씨의 유품이 발견되었답니다. 바로 이 사진입니다. 탐사대에서 E-mail로 지금 막 보내온 자료입니다. 사진 속의 여인은 로제티 스잔나 여사로, 아시다시피 세계적인 ‘인공지능’ 분야의 석학이었습니다. 죽은 아미모프씨는 그녀 밑의 연구원이자 연인이었다고 합니다. 스잔나 여사는 알려진 대로 희생된 지구붕괴조사단의 일원이었습니다. 아시모프씨는 죽은 연인 스잔나 여사의 영혼을 따라...”
싫다. TV 속의 앵커는 여전히 하드보일드한 목소리로 낭만적인 채, 애도하는 채 하고 있었다. 눈물이 멈출 것 같지 않았다. 그때 XP-10T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XP-10T를 꼭 끌어안았다. 차가운 금속성의 느낌. 그래도 괜찮다. 사랑이란 말은 기억하고 있으니까.
“사랑해 스잔나...”
우웅. 소리와 함께 XP-10T의 몸에 온기가 감돌았다. XP-10T의 팔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포근하다. 그리고.
“나도 사랑해 아시모프.”
로봇이 말했다. 스잔나의 목소리로. 어렴풋이 기억나는 지구붕괴조사단의 다큐멘터리, 거기서 들었던 그녀의 마지막 음성으로...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AI의 초보였던 아시모프는 그의 연인이 이루고 싶었던 꿈을 이룬 것이었다. 모든 인공지능 과학자의 꿈과 같은 ‘사랑의 인공지능’을 아시모프는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창혁아... 여기는 눈이 안 오는데 어쩌니.......”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캐롤이 창밖으로 들려왔다. 오른 쪽 머리가 아파왔다.
2003. 12. 23.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