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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양말 벗기 무브먼트 14

멀고느린구름 2011. 12. 20. 12:04


진보와 진화 7



진 :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나 : 네, 진 선생님 말씀하십쇼.


진 : 진보란 뭐냐. 진보가 꿈꾸는 세상은 뭐냐. 간단하게 말씀 드리자면 이런 겁니다. 진보란 한 발짝 더 나아가자는 겁니다. 진보적인 세상이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란 겁니다.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을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다소간 부정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의문을 가져야 하고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쓰고, 레닌이 공산주의의 깃발을 올렸을 때의 진보는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의 폐단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유재산제도에 의한 부의 편중현상을 해결하자는 것이 진보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나누는 세상, 공동체 사회, 평등 이런 것들이 진보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폐해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의 모습과 지금의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몇 가지 문제들이 더 추가되었습니다. 소수자의 인권, 생태계의 파괴 문제, 실업문제, 양성평등, 고령화, 인류 인구수의 폭증, 세계 평화… 이런 의제들이 진보의 화두로 더해져 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집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문제들이 해결이 되지 않은 채로 자꾸만 새로운 문제들이 더 추가되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문제들이 하나 둘씩 추가되어 갈수록 진보는 파편화되어 갔습니다. 하나의 진보가 녹색진보, 여성주의진보, 노동진보, 민주진보, 인권진보, 평화주의진보 등등등 수 많은 갈래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렇게 되어갈수록 진보의 응집력은 약해지고,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진보는 서로 싸우는 집단이라는 굴레가 씌어졌습니다.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자본의 세력은 점점 더 세상을 파편화 시키고 다양화 시킬 것입니다. 모두가 ‘개인'에 집중하게 만들고 개개인의 욕망을 최대한으로 증폭 시키는 사회를 설계해 갈 것입니다. 그럴 수록 사람들은 ‘하나의 생각’ 아래 모이기 힘들어지고 자본에 반대하는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다른 의제들에 대한 의견의 차이로 서로들 등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개인에 집중하라고요? 개인이 가진 마음의 문제라고요? 그것이 ‘자본'의 함정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개인에 집중하면 할수록, 우리의 마음만을 성찰하면 할수록 우리는 서로의 차이에 집중하게 되고, 거대한 자본 앞에 조그만 개인으로 머물게 될 것입니다.

  진보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개인'의 가치에 주목했던 것은 19세기입니다. 그 이전 수 백년의 역사 동안 ‘개인'은 더 큰 전체와 사회에 의해 억압 당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개인'을 이끌어내고자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개인'에 집중하는 세상입니다. 물론 여전히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구조는 달라져 있습니다. 이전에는 억압 당하는 개인이 다수였고, 억압하는 사회는 소수였습니다. 지금은 억압 당하는 개인이 소수고, 억압하는 사회는 다수가 되어 있습니다. 억압 당했던 이들이 그들 속에서 또다른 누구를 억압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합니까. 틀린 것은 우리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틀린 세상이 자꾸 우리의 생각을 틀리게 하고 있습니다. 어긋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양말을 벗어야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양말을 벗게 만드는 세상을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양말을 신고 있으면 자유롭지 못하다구요? 왜요? 양말을 신고 있든, 레깅스를 신고 있든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진정 자유로운 세상입니다. 억압이 없는 세상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저는 진보 사회란, ‘억압이 없는 사회’라고 축약하고 싶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초목이든 타고난 그대로 자기의 삶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욕망을 길들이는 ‘자본'의 먹구름이 걷힐 때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혹은 ‘자본주의'의 선글라스를 벗을 때, 그제서야 진짜 진보적인 세상에 대한 꿈을 시작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나 :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결국, 진 선생님의 말씀은 ‘현재의 진보’가 꿈꾸는 세상이란 궁극적으로 ‘자본을 극복한 세상'이라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잘 들은 건가요?


진 : 네,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게 보셔도 무방합니다. 


나 : 네,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일반 시청자들에게는 다소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특히, ‘자본'이라는 게… 보통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참 막연한 것이거든요. 보통은 자본이라고 한다면 뭐 대한민국 1%, 특권층, 재벌 이런 대상을 연상하곤 합니다. 하지만 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본'은 그런 게 아니지요?


진 : 네, 그렇습니다. 그런 자본가들마저도 ‘자본'에 조정 당하고 있는 겁니다. 궁극적으로 자본가들 역시 ‘자본'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민중의 하나입니다. 


나 : 네, 그렇군요. 이 부분은 참 어렵습니다. 별도의 토론회를 기획해야할 정도로요. 오늘은 시간이 여의치 않으니 다른 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 부분도 함께 생각해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그럼, 다음으로는 우리 양말 벗기 무브먼트 쪽에서 말씀을 해주실까요. 최 박사님, 괜찮으십니까?


최 : 마, 네 괜찮습니다. 이거 참 오랜만에 한 마디 하는 것 같군요.


나 : 하하, 네. 발언 시간을 넉넉하게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못했던 말씀 마음껏 하셔도 괜찮습니다. 


최 : 마… 우리 진 선생님이 좋은 말씀 많이 하셨습니다. 근데 거 우리 국민 여러분도 들어보셔서 아시겠지만 저쪽 말은 너무 어려워. 너무 어렵다 이거죠. 참 좋은 거 자알 알겠는데, 어렵고… 또 무서워요 좀. 어려운 데다 무섭기까지 하니깐 직접 내가 나서서 하기가 꺼림직하다는 거죠.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마, 저쪽에서는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요즘에도 그렇고 결국 하는 방식이 뭐냐면 영웅을 내세우는 거죠. 사람들이 반할만한 영웅, 지금으로 치자면 스타죠. 스타를 내세워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그 스타의 말에 사람을 동조하게 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 힘을 모아 파워게임을 하는 겁니다. 러시아 혁명의 방식도 그랬고, 결국 저쪽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방식은 결과적으로 폭력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면 모두가 사랑하는 슈퍼스타라는 건 존재할 수 없거든요. 바뀐 세상을 받아들인 준비가 된 사람이 있는 반면,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도 있거든요. 

  근데 마.. 사람을 바꾸는 게 어디 쉽습니까? 사람을 바꾸는 건 정말 어렵습니다. 보세요. 고타마 싯다르타, 나자렛 예수, 콩쯔. 그 분들이 언제적 사람입니까? 그 분들이 사람 좀 바꿔보려고 시작해서 그 후예들이 천 년이 넘게 지금껏 애를 쓰고 있는데… 어디 사람이 바뀌었습니까? 안 바꿔졌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뒤바꾼 다음 사람들 보고 당신들 사는 방식, 생각의 구조를 바꾸라고 하면 “아, 네 알겠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까요." 라고 하면서 싹 바뀌어 진답니까? 안 바뀐다고요. 오히려 생각을 바꾸기 싫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다시 힘으로 대항해 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뭐에요.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피가 튀고 사람이 죽는 겁니다. 마 어떻게든 해서 반대편 쪽 사람을 다 죽였다 칩시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단순하게 그렇게 전제를 해봅시다. 그러고 나면 세상이 퍽 평화로와지겠습니다.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 만든 세상이 참 아름답기도 하겠습니다. 그건 단지 살인자들의 왕국일 뿐입니다. 피로 만든 세상은 반드시 또 다른 피로 망하고 맙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런 방식으로 무수한 피를 흘려 온 겁니다. 영웅은 또 다른 영웅으로 대체될 뿐입니다.


나 : 최박사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상대방에 대한 비판보다는 제가 질문했던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란 주제로 발언을 이어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최 : 거 넉넉하게 시간 주신다면서요. 


나 : 네, 그런데 발언 주제는 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최 : 허허. 거 참, 좀 차분히 들어보세요. 이게 다 관련된 이야깁니다. 


나 : 네, 알겠습니다. 그럼 계속 말씀하시죠.


최 : 아… 그제 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나 이것 참… 사회자 양반이 진행을 방해를 하나.


압 : 미스터 최. 제가 이어서 말해도 좋습니까.


최 : 아이고, 성하. 물론입니다. 오 프리덤.


압 : 오 프리덤. 제가 이어서 말하겠습니다. 


나 : 아, 네. 그럼 성하께서. 



2011. 12. 2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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