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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양말 벗기 무브먼트 16(완결)

멀고느린구름 2012. 1. 14. 09:07



16.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개 대담회 <진보와 진화>에 대한 국민적, 아니 세계적 관심은 엄청난 것이었다. 동시간대 시청률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던 <1박 2일>을 끌어내리고 시청률 1위에 올라선 것은 물론, 그 수치는 38.1%라고 하는 상상할 수 없는 숫자에 이른 것이다. 국내 시청률에 잡히지 않은 전 세계 시청률까지 합치자면 그 기록은 아마 1964년 비틀즈가 미국에 상륙한 순간을 실시간 중계한 방송의 순간 시청률를 뛰어넘는 것이었을 거다. 덕분에 나는 연말에 공중파 3사에서 공동으로 개최한 통합 연예대상에서 최고의 시사프로그램상과 최고의 피디상, 2개 부문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댓가로 방송 이후 쏟아지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 - <진보와 진화>와 관련된 인터넷 기사만 589건이 양산되었다. - 과 재방 요청, 그리고 쇄도하는 세계 각국의 프로그램 판매 요청에 대응하느라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압둘 아자르 씨에 대한 불손한 태도에 대해 항의하는 ‘양말 벗기 무브먼트' 회원들의 끝없는 항의와 협박에 대처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방송국에 불을 지르겠다는 문자도 있었고, 내 아이를 납치해 보호하고 있다는 전화도 받았다. 물론 방화범은 방송국 앞을 지나가지도 않았고, 나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방송일로부터 6개월이 지나 있고, 해는 바뀌어 있다. <진보와 진화>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잦아들었고, 그 자리를 소녀시대의 신곡 발표와 그에 따른 각종 이슈들이 대신하고 있다. 진정겸 씨가 방송 이후 네티즌들과 정말로 후속 토론회를 가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여전히 그는 칼럼리스트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소녀시대에 대한 남성들의 관음증적 태도에 대해 솔직하게 썼다가 큰 곤경에 처하고 있는 중이다. 최교종 박사는 아마도 ‘양말 벗기 무브먼트' 회원이자 압둘 아자르의 2328번째 공식 제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을 테다. 불행하게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그에게는 항상 2328번째 차례에야 돌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압둘 아자르 씨 역시 여전히 세계를 순회하며 유명세를 이어가고 있다. 별다른 추문은 들리지 않는다. 최근에는 일본에서 <진보와 진화> 같은 컨셉의 방송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두 번째’는 크게 화제가 되지 못했다. 


  국내 J 일간지에서 여론조사한 결과는 흥미롭다. 대한민국 국민의 15%는 여전히 양말 벗기 무브먼트를 거부하고 있으며, 85%는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떠들석한 화제를 몰고 온 대담회였지만 방송 이전과 방송 이후 사람들의 의식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모든 소란이 가라앉은 지금 나는 혼자 책상에 앉아 이 후기를 쓰며 무척 허탈해하고 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왜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며, 이것으로 무엇을 바꾸고자 한 것이었을까. 라고 생각해보았자 사실, 처음 시작은 단순한 흥미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케냐 AA다. 최상급 원두 커피다. 물론 이 원두를 생산한 사람들은 전혀 최상급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을 테지만. 쓴맛이 혀끝까지 베어든다. 


  이쯤에서 나는 고난도 대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변명을 하자면 분명 <진보와 진화>는 이 한 노동자의 삶을 개선해주고 싶은 일말의 선의를 담은 기획이었다는 점이다. 허나 사람의 선의란 항상 선한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고난도 대표는 몇 일 전 강제 철거 명령을 받은 자기네 양말 공장의 화장실에서 목을 메어 자살했다. 서너 개의 진보 언론만이 이 사실을 보도했다. <진보와 진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사그라든지 오래였고, 노동자의 자살은 지나치게 빈번했다. 고 대표는 양말에 목을 메었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다. 라디오에서 비틀즈의 ‘인 마이 라이프’가 흘러나온다. 커피 잔을 내려 놓으며 생각한다.

아, 나는 무슨 짓을 한 걸까.  

 

2012. 1. 14.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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