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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진화 6
나 : 네 여러분 그럼 다시 이어서 세기의 토크쇼 ‘진보와 진화' 계속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 대표님께서 압둘 아자르 성하에게 ‘양말 벗기 무브먼트'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을 구원한다고 하는 데 대체 그 주체가 되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에 노동자는 포함이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라는 논지의 질문을 하셨고, 아자르 성하는 고 대표님의 자세를 지적하며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고 얘기를 하자고 제안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고 대표님, 준비가 되셨습니까?
고 : 그거 뭐죠? 저기… 아. 그래. 오 프리더엄~
나 : 하하 네. 준비가 되셨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아자르 성하 말씀 하시겠습니까?
압 : 오 프리덤. 제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 계신 미스터 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 노동자의 일생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까?’ 라고. 그 질문을 받고 순간 제 마음 속에 많은 의문이 샘솟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늘 ‘인류’나 ‘중생'의 차원에서 고려해 왔습니다. 개개인의 특성이나 직업, 처한 환경 같은 것은 성찰의 항목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속성을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욕심을 내고, 화를 내고, 질투를 하며, 슬픔에 빠지고, 외로워하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 주된 관심사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어떤 행위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입니다. A라는 보편적인 인간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A는 새로 출시된 아이패드를 가지고 싶습니다. A의 마음에서 소유욕이 발현된 것입니다. 그래서 A는 좀 무리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패드를 구입합니다. 그리고 아이패드를 품에 안고 집에 돌아오며 만족감을 얻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경제상황에 대한 걱정도 함께 짊어지게 됩니다. 갖고 싶었던 아이패드를 구입했다는 이 행위를 단순하게 도식화시켜 보면 결국, 소유욕이라는 마음의 씨앗이 만족과 불안이라는 두 가지 마음의 열매를 맺은 사건입니다. 이 마음의 시작과 마음의 결과 사이에는 수 많은 인간의 행위들이 대입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떠한 인간의 행위를 대입하더라도 마음의 시작과 결과가 변하지 않는 한 본질적으로 사람의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욕망하고 가지고 만족하지 못하고, 혹은 만족하면서도 또 다른 무언가를 탐하게 되고. 다시 욕망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이 사이클의 무한반복 속에 갇히고 맙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 미스터 진께서도 강하게 비판하시는 ‘자본주의'의 근원적인 작동원리입니다.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표상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이란 존재의 근원적인 마음의 작동 원리를 ‘돈'이라는 욕망의 상징물로 가시화 시켜놓은 것입니다. 현상인 ‘돈’을 없앤다고 해서 본질인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욕망은 반드시 ‘돈'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를 매개물로 하여 인간의 삶 속에서 자기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수레바퀴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는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 세상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란 진보주의자들이 규정해놓은 계급 이전의 사람입니다. 아니죠. 보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사람' 그 자체가 계급이 되는 사람입니다. 지구, 혹은 우주라는 커다란 생태계 속에서 ‘사람'이란 계급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으면 들으시오. 오 프리덤.
고 : 뭔 소립니까.
진 : 제가 잠깐 정리하죠. 말씀 잘 들었고요. 네 잘 들었습니다. 사람이 근원적으로 어떤 욕망의 수레바퀴 속에 있고, 자본주의는 그것을 활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말씀… 네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제가 비판하고 싶은 지점은요. 그 말씀하신 그 논리가 결국 자본의 몰락보다는 자본의 생명선을 연장하는 방향으로 이 세계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결국 부르주아의 논리 속에 포섭 당하고 있다는 거지요. 노동 현장에서 아자르 성하의 그 얘기는 이렇게 기능해요. 야, 너 게으름 피지 말고 열심히 일해라.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냐. 그건 니 마음의 문제다. 다른 사람들을 봐라. 똑같은 조건이지만 마음의 평화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냐. 돈 많이 가진 사람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거, 그거 다 니 마음의 문제야. 돈 많은 게 뭐가 좋냐. 나 돈 많지만 별로 편하지 않다. 나도 불편한 거 무지 많다. 그러니까 분수에 맞게 니 인생에 만족하고 살아라. 니 마음의 문제에 집중해라. 이런 거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뭐냐면 결국 이 사회의 틀이 영원히 변하지 않은 채 끊임업시 지속된다는 겁니다. 가진 자는 계속 가지고 못 가진자는 계속 못가진 채로 그 상태에서 각자 마음의 문제만 열심히 돌아보며 살게 돼요. 사람들이 행복하게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게 될 수도 있겠죠. 자기 삶에 각자 만족하고 살면요. 뭐 그런 나라가 지구상 어딘가에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보편적인 복지가 안착이 된 북유럽 사람이 1%의 계층이 99%의 부를 독점하고 있지만 모두가 만족하고 있는 종교적인 나라에 여행을 갔다고 가정해봅시다. 이방인의 눈으로 그 종교적인 나라를 바라보았을 때 그것이 정말 ‘이상적인 사회'라고 감각할 수 있겠습니까. 아름답게 보일까요 그 세상이?
압 : 미스터 진. 진정한 깨달음은 반드시 자비를 동반합니다. 자비에 이르지 않은 자유, 자비에 이르지 않은 깨달음은 진정한 영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영성으로 진화한 인류가 구성원인 사회에서 부의 편중 현상은 해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 프리덤.
진 : 아니죠. 아니죠. 성하, 한 개인이 존재가 말이에요. 끊임없이 타인의 자비에 의탁해야 하는 세상이란 지나치게 비굴하고 수동적인 세계 아닙니까. 그것도 역시 부르주아의 논리에요. 그 뭐냐 얼어죽을 노블리스 오블리제 지랄하는 그거 아닙니까. 자본가들의 그 돈을 벌어준 것은 다 노동자들이에요. 그런데 으시대면서 무슨 시혜라도 되는 양 가진자가 자비심으로 가나한 자들에게 베풀어준다? 그런 빌어먹을 게 어딨어요. 그런 사회가 되면 될 수록 노동자 계급은 자존감을 상실하고 중세 이전의 노예로 퇴화하고 마는 겁니다!
압 : 오 프리덤. 자비라고 하는 행위는 반드시 경제적으로 더 가진 이가 덜 가진 이에게 행하는 행위는 아닙니다. 가령 돈은 수억원을 가지고 있지만 사랑이 없는 이가 가난한 이에게 돈을 베풀고, 가난한 이는 가진 이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서로에게 각자가 할 수 있는 ‘자비'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 행위에는 상하고저가 없습니다. 오 프리덤.
진 : 아, 성경책에도 쓰여 있는 좋은 말씀인데요. 프레임의 문제라고요. 프레임. 우리가 자본주의라는 선글라스를 끼고 그 아름다운 자비의 광경을 바라보면 모두가 “이야 이 선글라스 괜찮네. 쓸만하네.”라고 계속 생각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겁니다. 이 자본주의라는 선글라스는 ‘경제적 능력’을 그 세계의 가장 지고의 가치로 삼고 있고요. 그러면 그 프레임 속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는 결국 얼마나 ‘경제적 능력'이 우위에 있는가 하는 관점에 의해서 등급이 매겨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진보주의자들은 먼저 선글라스를 벗어던지자.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아주 박살을 내버리자. 그리고 다시 세상을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성하가 말씀한 그 모든 근원적인 행위들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겠고, 제 의미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압 : 미스터 진, 저는 이렇게 봅니다. 선글라스를 스스로 벗느냐, 어떤 보다 큰 힘에 의해서 벗겨지느냐. 이 차이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보다 더 큰 힘에 벗겨진 선글라스는 또 다른 선글라스를 부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보다 더 큰… 그 힘이란 언제나 ‘폭력'일 수밖에 없었다. 오 프리덤.
고 : 아니, 잠깐만요. 잠깐만! 저도 말 좀 합시다!
나 : 네 말씀하시죠. 고 대표님.
고 : 아니, 저 두 사람이 복잡한 소리들 하고 앉아 있는데. 간단한 거에요 아주 간단한 거라고요. 쓸데없는 소리할 필요 없이. 양말을 신자고요. 일단 양말은 신고 좌선이니 뭐니 사회 개혁이니 뭐니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뭐 어느 쪽을 하든 난 상관없어요. 근데 좀 양말은 신고 하자고요. 아 씨발 진짜. 공산당이 공산당 만들면서 양말 벗고 했나, 예수님이 교회 지으면서 전부 양말 벗고 하라고 10개명에 써놨어요? 아무 상관없는 양말을 왜 건드리냐고. 당신들 그렇게 머리 좋고 대단한 사람들인데, 왜 당신들이 하고 있는 행동으로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고, 쫄딱 망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을 예상하지 않느냐고요. 이 놈의 토론회도 보니까 아주 영 엉터리야. 머리 좋은 놈들 세 놈하고 못 배운 나 하나 앉혀놓고 뭐야. 저 놈은 무식한 놈이요. 저 놈 말은 들을 것도 없소. 어서 굴러운 무지렁이가 토론회 질을 떨어뜨리네. 이런 말만 들을 거 뻔한 거 아니요. 아니, 뭐 난 이왕 나왔으니까 그런 거 뭐. 아니 난 그래 난 원래 무식해. 뭐 마르크스니 뭐니 난 그런 거 잘 몰라요. 모르니깐 그냥 무식하게 내 할 말만 할게요. 양말은 좀 신읍시다. 진짜 부탁합니다. 국민 여러분, 양말은 신고 합시다. 우리 공장 직원들, 양말 노동자 협회 사람들… 함께 먹고 삽시다. 진보, 진화, 그런 말들 다 좋은데요. 우리도 좀 낍시다. 우리도 그런 생각들 좀 같이 할 여유 좀 줘요. 아니 교주 양반,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뭐 말만 들으니깐 엄청 대단한 일 하는 거 같은데… 양말은 신고 하자고요. 신고 해도 되겠구만 그거. 양말하고 아무 상관 없는 일 아니요 그거 사실. 당신네들 이상에 우리 목숨을 이용하지는 말아달라니깐요. 난 무신 논리 같은 걸로 당신네들 이길 자신은 이제 없고 부탁 좀 합시다. 네?
압 : 오 프리덤.
진 : ….
최 : ….
나 : 네. 고 대표님께서 아주 진솔한 말씀을 해주셔서 한참 열기가 달아오르던 토론회장이 좀 숙연한 분위기가 되었는데요. 굉장히 의미 있는 말씀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말씀이 우리 토론회의 마지막 주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마지막 질문을 드리도록 하지요. 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여기 참석해주신 우리 패널 여러분, 그리고 시청하고 계시는 시청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마지막 주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 어떤 모습입니까. 양말 벗기 무브먼트가 지향하는 세상, 그리고 양말 벗기 무브먼트에 찬성하지 않는 쪽이 바라는 세상, 또 한 편 우리 고 대표님과 같은 노동자들이 바라는 세상. 각각의 모습이 참 다를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물음에 대한 각자의 답을 듣겠습니다. 누구부터 말씀하실까요.
2011. 12. 16.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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