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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양말 벗기 무브먼트 7

멀고느린구름 2011. 10. 12. 22:23



7. 대인류 공개 대담회, ‘진보와 진화’


  대담회의 주제는 ‘진보와 진화'로 결정했다. 양말 벗기 무브먼트 측 패널로는 압둘 아자르와 그의 통역을 담당하고 토론을 지원할 국내 영성 연구가 최교종 씨가 확정되었다. 양말 공장 측 패널은 노동자 대표 고 씨와 유명한 진보논객 진정겸 씨로 결정되었다. 보조 패널을 섭외한 것은 사측이었다. 기왕하는 대담회인데 화끈하고 집요하게 들어가 보자는 것이었다.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사회자를 맡았지만 진행을 잘하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단지 압둘 아자르와 고 씨가 주고 받을 이야기에 흥미가 있을 뿐이었다.

  주제는 진정겸 씨와 최교종 씨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었다. 진정겸 씨는 “진보하지 않은 사회에서 종교적 진화 운운하는 것은 알파벳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영문독해를 시작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즉, 우리 사회의 선결 과제는 진정한 진보를 이루는 것이지 ‘실체가 없는 진화론'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반면 최교종 씨는 “진정한 진보는 곧 진화입니다. 인간의 영성이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진보는 나태함과 또 다른 문제거리를 양산할 뿐이지요. 공평하게 소유해야 한다고요? 더 가진 자에게서 빼앗아서 나눠줘야 한다고요? 마음의 눈을 개안하십쇼. 공평도, 소유도,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도 없습니다. 오직, 무한한 자유뿐. 무한한 생명뿐. 너와 나, 네 것과 내 것이라는 모든 굴레에서 자유로워지면 인간은 진정 해방됩니다.”라며 인간의 진화를 주장했다. 두 사람은 고 씨와 압둘 아자르의 갈등을 ‘진보와 진화'의 갈등으로 본 것이었다. 흥미로운 관점이었고, 그 관점으로부터 오히려 쉽고 더 풍부하게 이야기가 풀어져 나올 수 있을 듯 했다.

  대담회의 날짜는 3일 뒤인 7월 27일이었다. 1953년 대한민국이 북한과 휴전을 한 날이기도 했다. 애초에 이 대담회는 극비리에 비공개로 진행한 후 기획 기사로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중간에 정보가 새어버려 연일 인터넷 검색어 1위에 오르는 등 사회적 관심이 비약적으로 높아져버렸다. 여느 매체에서 흔히 보도된 김빠진 인터뷰 기사들만 양산해낸 국내 언론매체들이 술렁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몇몇 메이저 방송사는 내게 전화를 걸어 노골적으로 자사 방송국에서 생중계로 대담을 진행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나와 이 대담회를 지원한 사측의 임원들이 모여 몇 차례 회의 끝에 A 방송국에서 생중계로 대담을 진행키로 결정했다. 대신 기사화에 대한 독점권은 사측이 갖기로 협상을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독점권을 갖고 싶었던 사측의 반대가 극심했던 생중계가 결정된 것은 내가 끝까지 주장을 밀어부친 탓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대담회는 단순히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인류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분수령이 될 것입니다. 인류사 전체에 매우 중대한 대담회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이 대담회를 독점할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이 대담회는 우리가 인류에게 바칠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오버에 모두들 껌뻑 속아넘어가 덜컥 생중계를 승인한 것이다. 아무튼 인생에서 연기력은 기르고 볼 일이었다. A 방송국은 대담회 장소로 1000명 이상의 관객이 수용 가능한 자사의 공연장을 선정했다. 이게 무슨 콘서트도 아니고. 라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이런 문제의 경우 대체 A 방송사의 누구에게 항의를 해야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막혀버려 포기했다. 뭐 절대 다른 이유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대담회 장소가 결정된 후 대담회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대담회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2011. 10. 1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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