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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페미니스트는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페미니스트' 란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합의이다. 한 세기 전에 탄생한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어휘는 이제 사람들이 종종 사용하는 어휘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만큼 오독되어 읽히고 쓰이는 어휘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넷떼즌들에 의해 주로 '꼴페미'라는 말로 변형되어 쓰이는 '페미니스트'는 여성우월주의자와 남성혐오주의자, 독신주의자, 성생활 문란자, 가정파괴범, 물질만능주의자(된장녀), 기회주의자 등등의 다양한 의미를 포괄하고 있다. 일부 네티즌의 악의적인 왜곡으로부터 출발한 '꼴페미'의 이미지는 이제 넷떼즌들 사이에서는 거의 일반화된 '페미니스트'의 이미지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현장에서든 심정적으로든 다양한 페미니즘'들'이 지향하는 가치에 공감하고 그 사상적 양분을 공급받은 사람이라면 위에 나열된 모든 페미니스트의 정의들이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페미니스트가 개혁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들을 넷떼즌들은 페미니스트의 지향점으로 뒤집어 씌우고 마녀사냥을 하고 있다.
페미니즘을 조금만 공부해본 사람이라도 페미니즘이 하나의 통일된 이념 체계가 아니라 여러가지 다양한 분파를 갖는 이념, 혹은 운동의 집합적 개념이란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사회체제 내에서의 여성 권익 향상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는 자유주의 페미니즘,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를 지적하고 계급 혁명을 통한 여성의 해방을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가부장제를 흔들고 자매애를 강조하는 급진적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와 급진적 페미니즘을 종합하고 극복하려 한 사회주의 페미니즘
등의 전통적 페미니즘. 그리고 포스트 모던 시대를 맞아 새롭게 생겨난 에코 페미니즘, 우머니즘, 남성 페미니즘, 제 3세계 페미니즘 등의 새로운 페미니즘들. 이처럼 페미니즘은 서로 성격을 달리하는 여러가지 사상과 운동의 지류를 느슨하게 묵는 하나의 끈일 뿐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스트는 어떻다' 라고 규정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페미니스트냐 아니냐로 판단하기 앞서 어떤 페미니스트냐 라는 것을 함께 살펴야 하는 것이다.
<한국에 페미니스트는 있는가>에서는 단일한 하나의 기준이 아닌 다양한 기준을 가지고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로서 살아가고 있다고 '판단'되어 지는 사람들을 선별해 그들의 삶을 기술하고 있다. 책을 펼치면 나오는 유숙렬씨의 '페미니스트는 사랑하기 위해 싸움을 건다'는 페미니즘 관련 책을 볼 때마다 접하게 되는 오래된 변론이다. 대한민국의 상황에서는 여성주의 책을 만들 때 이런 완충장치(?)를 해두지 않으면 아무래도 곤란한가 보다. 이처럼 끊임없이 페미니즘에 대한 오독된 평가를 변론하고 여성들이 처한 실제의 상황에 대해 장황하게 서술하게끔 만드는 사회에서 '여성상위시대' 라는 헛소리가 나오는 건 참으로 우울하다.
아무튼, 페미니즘을 삶에서 직접 실천하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 중 한국에서 마땅한 롤모델을 찾기 어려웠던 이들에게 이 책은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떠한 삶의 모습을 페미니스트의 삶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지, 넷떼즌들에게 오독된 '꼴페미'가 아닌 진짜 페미니스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세계를 바꾸어 가고 있는지에 대해 <한국에 페미니스스트는 있는가>는 귀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안교육과 대안적인 삶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지식인들의 변화를 충동질하는 또 하나의 문화의 조한혜정.
소설을 통해 새로운 여성적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는 소설가 최윤.
21세기에도 꿋꿋이 살아 남아 낮은 곳에 있는 여성의 삶을 대변해주고 있는 여성신문의 CEO 이계경.
정치판에서 여성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미경.
대중을 상대로 한 흡입력 있는 강연과 글로 여성주의를 전파하는 여성학자 오숙희.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받는 작가인 동시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로 페미니즘을 가장 강력하게 전파시켰던 소설가 공지영.
영화 읽기를 통해 여성의 삶과 여성주의의 가치를 전하는 김소영과 유지나.
<한국에 페미니스트는 있는가>의 지은이들에 의해 한국의 페미니스트로 지목된 이들의 활동 모습은 넷떼즌들에 의해 유포된 '꼴페미'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들의 삶은 누구보다 치열하고 고민에 차있으며 긍정의 사회를 지향한다. 연역적으로 페미니스트는 어떠하다! 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허나 이렇게 실제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삶을 모아 보면 귀납적으로 페미니스트는 이런 느낌의 사람들임을 감지할 수 있다. 넷떼즌들은 전혀 다른 페미니스트들을 접하며 '꼴페미'라는 이미지를 형성했는지는 모르겠다.(그들이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는 이들은 전혀 페미니즘과 관련 없는 사람일 경우가 90% 정도지만) 하지만 적어도 내가 귀납적으로 얻은 페미니스트의 느낌은 따스하고, 세계를 좀더 아름답게 변화시키려는 선의에 차있고, 여러 다양한 생각과 문화에 대해 열려 있으며, 정의에 대한 굳건한 의지가 있는 멋진 존재다. 물론, '꼴페미'를 우려해야 하듯이 극단적으로 '페미니스트'를 우상화시키는 것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향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아직 스스로 페미니스트로 자처하기에는 우스운 수준이다. 아직까지는 친여성주의 정도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고 여긴다. 허나 나도 조금씩 더 노력하여 언젠가는 떳떳하게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해도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 누가 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싶다. 어려운 상황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한국의 페미니스트 모두에게 존경을 표한다. <한국에 페미니스트는 있는가> 같은 책이 더 많이 발간되어 외롭게 싸우고 있는 여러 페미니스트들에게 작은 위로와 응원이 되기를 바란다.
2008. 3/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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