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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리뷰

고경원 - 작업실의 고양이

멀고느린구름 2011. 8. 23. 22:11
작업실의 고양이 - 8점
고경원 글.사진/아트북스


"완두는 이제 그의 곁에 없지만, 그림 속에서는 여전히 흐드러지게 핀 꽃향기를 만끽하며 봄을 그리는 '봄 고양이'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봄바람에 한들한들 움직이는 고양이 털 한 올 한 올 심듯이 화폭에 그려 넣을 때마다, 작가가 가족으로 받아들였던 단 한 마리 고양이의 기억은 지친 마음을 다정하게 어루만질 것이다. 살다보면 때로 혹독한 겨울을 지날 때처럼 춥고 외로운 날도 있을 것이나, 보송보송하고 따스한 고양이의 추억이 있는 한, 언제나 마음은 봄에 머문다."  230p~231p

  나는 고양이를 길러 본 적이 없다. 지금부터 내가 기른 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싶다. 내게는 '개 공포증'이 있었다. 개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100미터 앞에라도 개가 보이면 길을 피해서 한참을 돌아가곤 했다. '까미'와 함께 살기 이전의 이야기다.

  초등학교 3학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보니 집 대문 앞에 종자 없는 새까만 개 한 마리가 묶여 있는 것이 아닌가. 개는 나를 보자마자 잡아먹을 듯이 짖어대는 것이었다. 이건 웬 똥개인가 싶었지만, 무서워서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엄마를 소리쳐 불러봐도 집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한참을 기다려서 엄마가 장을 보고 돌아온 후에야 겨우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고난은 계속되었다. 매일 매일 방과후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나와 문 앞에 버티고 누운 까미의 신경전이 계속되었다. 나는 이웃집 옥상에 밧줄을 동여매고 '다이하드' 뺨치는 기술을 동원해 대문이 아닌 창문으로 집에 들어가곤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시간이 많이 흐르다 보니 까미도 내 얼굴을 완전히 익혀서 나를 보고도 짖지 않았다. 오히려 내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벌써 벌떡 일어나서 내가 오는 쪽을 바라보며 꼬리를 흔드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천진하게 내 하는 양을 쳐다보는 까미를 피해 남의 집 옥상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 창문으로 집에 들어갔다. 하루는 밧줄을 타고 내려와 창문으로 들어가면서 까미 쪽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까미와 눈이 딱 마주쳤다. 까미는 말할 수 없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면서 꼬리를 흔들고, 끄응끄응 소리를 냈다. 나는 창문을 통해 집 안에 들어가서는 다시 대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까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살짝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조심스레 손을 갖다대자 까미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할짝거리기 시작했다. 간지럽고 따뜻했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대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왔다.

  친구가 된 까미와 2년을 함께 살았다. 그러다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 가는 집이 작고 마당이 없어서 까미를 데려갈 수 없어 이웃집에 주고 오게 되었다. 하얀 포터 트럭 뒤에 짐과 함께 실려가면서 까미가 있을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뒤부터 나는 동네에 돌아다니는 개만 보면 달려가 까미에게 못다준 정을 주려고 안달이었다. 그리고 수년 후 다시 까미를 닮은 까만 개를 기르게 되었다. 그 개는 3년 후 불의의 사고로 죽고 말았다. 그 후 지금까지 여러 사정으로 인해 다시 개와 함께 살지는 못하고 있다.

  과거에는 개나 고양이를 '애완동물'이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거기에는 인간의 '장난감'이라는 모종의 함의가 깃들어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보편화되고 있다. 함께 살아가는 생명이라는 인식이 없다면 개나 고양이를 기르지 말 것을 우선 당부하고 싶다.

  고양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이 사라지면서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그와 함께 버려지는 고양이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아직까지 고양이를 '반려동물'이 아닌, '애완동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는 반증이다.

  고양이가 인기 동물이 되면서 고양이에 관한 책들도 늘고 있다. 고양이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얼마나 기르기 좋은 동물인지에 대한 책들은 넘쳐난다. 서점에서 <작업실의 고양이>라는 책을 집어들었을 때는 그런 류이 책이 또 한 권 추가 되었다 싶었다. 하지만 귀여운 고양이의 모습과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함께 실려 있는 사진이 무척 매력적이서 사진 감상용으로 책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막상 책을 펼쳐들자 한 장 한 장 넘기며 진지하게 한 문장 한 문장을 정독하게 되었다. 자신이 이름난 고양이 애호가인 저자 고경원 씨는 젊은 예술가들이 고양이와 함께한 행복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행복 뒤에 겪어야 했던 이별의 슬픔에 더욱 세심한 귀를 기울인다. 그 세심한 귀 기울이기를 통해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한 고양이들의 이야기는 더욱 아름다운 울림으로 다가온다.

  <작업실의 고양이> 속에서 고양이들은 '생명'으로서 정당한 가치를 부여받고, 사람과 동등한 동반자의 지위에서 추억된다. 마치 소중한 연인, 친구,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고백을 듣는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는 듯한 기분에 젖는다. 책 갈피갈피에 놓인 고양이 사진과 고양이의 동반자로서 살아간 예술가들의 사진은 오래오래 두고 다시 보고 싶어질 만큼 아름답다.

  이 책을 읽은 감상을 전하면서 처음으로 나의 옛 친구 '까미'를 떠올리게 된 것은 이 책이 귀엽고 시끄럽지 않아 기르기 편한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인연과의 추억'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맙고 다정하며 아름다운 책이다.


2011. 8. 23. 멀고느린구름

작업실의고양이고양이를사랑한젊은예술가를만나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지은이 고경원 (아트북스,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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