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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리뷰

페터 한트케 - 왼손잡이 여인

멀고느린구름 2011. 7. 24. 16:32
왼손잡이 여인 - 6점
패터 한트케 지음, 홍경호 옮김/범우사


그녀, 집을 떠나다 




나 어느 낯선 대륙에서 그대를 만나고 싶어

수많은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혼자 있는 그대를 만날 수 있으리

그대도 수천의 타인들 가운데서 나를 보고

우리들 끝내는 서로를 향해 다가가리라. 


- 89쪽-



  중학생 시절 나에게는 유럽권의 영화를 좋아하는 취미가 있었다. 어머니가 비디오 가게 점원으로 일하셨던 적이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온갖 마이너한 유럽 영화들을 가져다 보곤 했었다. 그러던 중 독일에서 만들어진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게 되었고, 영화의 각본을 담당한 '페터 한트케'라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작가를 알게 되었다. 


  극작가를 겸하고 있는 '페터 한트케'는 독일문학의 거장으로 평가 받고 있는 소설가이다. 주로 리얼리즘에 기반해 사회현실과 인생의 부조리를 담는 작품들을 써왔다. - 물론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을 것인데, 날이 더우니 너무 디테일하게 접근하지는 말자. -  이번에 읽게 된 <왼손잡이 여인>이라는 중편 분량의 작품도 그의 일관된 작품 경향성을 담지하고 있다. 


  올해 초 알고 지내던 지인으로부터 생일 선물로 받은 이 책을 펼쳐들게 되기까지 6개월이 걸렸다. 먼저 덥썩 책을 싸두고 몇 개월이고 묵혀 두고서야 겨우 찾아 읽는 내 고약한 습성 때문이다. 읽게 되기까지 몇 년이 걸리는 책도 있으니 그래도 <왼손잡이 여인>은 다행인 경우라 해야할 것이다. - 그러니까 누구에게 다행? - 


  소설의 주인공인 '여인'은 어느날 갑자기 동거남 브루노에게 "당신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여인은 그런 남자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브루노는 여인과 알고 지내는 동네의 여선생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혼자가 된 여인은 자신의 아들과 함께 자립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타이프 라이터기를 꺼내고, 오랫동안 쉬었던 번역일을 다시 시작한다. 그 와중에 출판사 사장은 여인에게 음흉한 유혹을 시도하고, 길거리에서 여인에게 반한 배우도 등장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혼자'인 존재다. 여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해도 될 여인의 아들마저도 결국 '자기만의 삶'을 살 뿐이다. 여인의 아버지도, 여인의 친구도, 여인을 사랑한다는 사람들도 모두 혼자고, 그들의 인생을 살아간다. '왼손잡이'라는 존재는 대부분이 '오른손잡이'인 세상에서 고립된 존재이다. '왼손잡이 여인'은 동거남이 '자립할 수 있는 존재'임을 천명한 순간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나는 자립할 수 있는 존재인가. 나는 왼손잡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더 타인에게 의지해, 혹은 타인의 그림자 뒤에 숨어서 살아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아이를 혼자서는 키울 수 없는 준거로 자신의 자립을 영원히 유보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혼자가 된 여인은 '자립'을 위해 잠자고 있던 자신의 재능을 다시 일깨워내고, 남성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여성들과의 연대를 통해 자기만의 삶을 회복하려고 한다. 서서히 그녀의 자립성이 회복되어 가자, 숱한 외로운 남성들(감정적으로 '혼자'인 존재들)이 여인의 주변으로 찾아온다. 출판사 사장이. 그 사장의 운전사가. 바람둥이 아버지가. 갈라선 동거남이. 우연히 만난 배우가. 여인은 이제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그 모두를 자기의 집으로 초대하고 파티를 연다. 그리고 파티의 끝에 혼자 남는다. 어느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채. 


  물론, 언젠가 그녀는  아주 매력적인 이성을 만나서 다시 함께 일상을 꾸려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또 언젠가는 다시 만난 그와도 이별할 수 있을 것이다. '왼손잡이'여서 '오른손잡이'들에게 주눅이 들어서 숨 죽이고, 수동적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사람에게는 누구나 '왼손잡이' 와 유사한 남과 다른 특성들이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것이 '이름'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드러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일 뿐. 남들과 다른 것이 있으면 어떠랴. 내게 약점이 있다면 어떤가. 내가 아닌 당신들도 나와 다르고, 각자의 약점이 있지 않은가. 결국, 내가 진정 '나'로 홀로 설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무더운 여름밤,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한달음에 읽어내려갔다. 흥미진진한 이야기 구조는 아니지만, 묵묵하게 여인의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슬며시 웃음 짓게 되는 소설이다. 비틀즈의 '쉬즈 리빙 홈(she's leaving home)'을 반복 청취하며 읽었다. 


 

2011. 7. 24.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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