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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리뷰

히라노 게이치로 - 달

멀고느린구름 2011. 7. 15. 22:07
 - 10점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히라노 게이치로의 <달>을 이제서야 완독했다. 그는 내가 아직 고교생이던 시절, 한창 문예지에 소설 등을 투고할 무렵, <일식>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고교 2학년 즈음이었던 거으로 기억한다.  <일식>을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사들고 와서 들뜬 마음으로 몇 장을 읽어내려간 후 책장을 덮어버렸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이었다.  나는 먹먹해진 마음으로 어둠을 머금은 바다를 한 없이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레벨이 다르다...'

같은 당대의 젊은 문청이라고 여기며, 신인작가의 패기를 주입 받고자 펼쳐든 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때 헤세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반열이었다. 결국, 나는 <일식>을 다 읽지 못하고 책장에 박제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문장을 갈고 닦아 1년 후에는 당시 청소년 문학상 공모전 중 가장 큰 규모의 공모전에서 최고 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아쿠타가와 상'에는 비할 게 못 되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흘렀다. 나는 언제나 마음 속에 히라노를 라이벌로 품어 왔었다. 그러면서도 두려운 마음에 그의 작품을 정면으로 마주하지는 못했었다. 현격한 레벨 차이에 짓눌려 글쓰기를 포기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어느덧 나도 글을 써온 세월만 10여년이 훌쩍 넘었다. 그렇다고 그를 넘어설 수 있다는 자만심이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다는 판단이 들었다. 현격한 차이가 여전히 느껴지더라도 글을 포기하지는 않으리라는 내성 말이다. 

  그의 작품 군 중에서 가장 읽고 싶었던 <달>을 먼저 펼쳐들었다. 히라노는 작품 내내 나를 압도했다. 그의 문장을 훔치고 싶은 마음에 메모를 하다가 그만 두어버렸다. 책 전체를 메모하는 것과 같아서다. 작품의 구성, 문체, 문장의 완성도, 묘사력, 생에 대한 통찰... 어느 것 하나 흠결이 없다. 완전무결하다. 내 생에 과연 이런 작품을 하나 건질 수 있을까 싶다. 어떻게 2000년대에 사는 그는 1890년대의 생을 이토록 완벽히 복원해낼 수 있었을까. 인물의 호흡까지 귓가에 들려올 듯하다. 책을 읽는 내내 환시와 환청이 나를 휘감았다. 

  <달>에 대한 어떤 수사도 <달> 자체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이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여전히 내게서 멀리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영영 가닿을 수 없는 것만은 아니다. ' 라는 오기도 발동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뒤지지 않는 작품을 발표하고 말겠다. 

 여느 서평처럼 <달>의 줄거리를 여기에서 나열하거나 가벼운 감상따위를 늘어놓는 것은 도리어 작품에 대한 폐가 되지 않을까 싶어 쓰지 않는다. 때론 말해질 수 없는 것, 쓰여질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달>이다. 근자에 읽은 최고의 소설이다. 나를 한 없이 부끄럽게 만들고, 한 없이 뜨겁게 만들었다. 고맙다. 


"환상의 밤은 어느새 현실의 밤과 뒤섞여 하나의 밤이 되었다. 마사키는 정신을 차린 기억조차 없이 어느새 암자 곁에 서 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언뜻 옷고름 푸는 소리가 등 뒤편에서 날아와 귓전에 스치는 것을 느꼈다. 
  몸을 부르르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희미한 소리가 갖가지 기묘한 일들을 한꺼번에 삼켜버리고, 옷과 함께 스르르 풀려버렸다.

 .......

 '아아'
 - 소리가 되지 않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법열(法悅)이 바람에 불려온 꽃가루처럼 일순 가슴에 퍼져나갔다."
<달> 104~105쪽


2011. 7. 1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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