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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의사는 해볼 것은 다 해보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물론 그 준비운동의 비법은 공개하지 않았다. 언제나 인생의 핵심 비법은 비공개 영역이었다. 스스로 터득하는 수밖에 없었으며, 스스로 터득한 것을 비법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갈라보기 전의 수박처럼 인생은 망막했으며, 근원적으로 피로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고, 시선은 창밖의 새를 좇았다.
“새를 한 마리 사줄까요? 하얗고 작은 새로 말이에요. 그런 새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다음에 올 땐 스위트피 화분도 하나 가져다 줄게요. 책은 읽을 수 있어요? 황석영이 새 소설을 썼어요. 아, 황석영 좋아하던가. 이문열 쪽이 나으려나요? 얼마 전에 박완서 선생이 돌아가셨어요. 박경리 씨 돌아가신 건 알죠? 아버지, 저기 소설을 말이죠. 그 소설을 다시 써보는 건 어떨까요. 의사 말이 희망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는 거에요. 결국, 의지의 문제라고. 본인이 의지가 없으면 어떤 치료도 의미가 없다는 거야. 그게 무슨 의사가 할 소린가 싶지만… 그렇다는 걸 어떡해, 씨발. 새 보면서 무슨 생각하세요? 엄마 생각하는 건가, 아직도. 무언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세요? 그럴 필요 없어요. 결국 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 뿐이야 사람은.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지고 지대한 영향을 주고 그런 게 진짜 있나. 아니야, 결국 자기 몫이고 자기 선택이야. 아버지나 엄마나 다 자기 인생에 충실하게 잘만 살아온 사람들이잖아. 근데 이제 와서 뭘 후회해. 그냥 그런 인생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라구요. 그러니까 소설을 쓰세요. 그렇게 쓰고 싶어 했잖아. 제2의 전태일 되든 뭐든 되보시라구요. 꿈만 꾸지 말고 해보라고. 어느 날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고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자, 그 다음 얘긴 뭐야. 왜 다음이 없어. 다음이 있어야지. 다음이 있고, 또 그 다음이. 다음 다음이 계속 있어야지. 그런 게 소설이잖아. 그런 게 사는 거잖아.”
내가 시끄럽게 굴었다는 양 창가의 새는 포르르 날아가버렸다. 아버지는 새가 날아간 방향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울컥 울음이 치솟았다. 어째서.
어두운 통로를 지나 비좁은 좌석에 아버지와 나란히 앉았다. 오른쪽 끝 귀퉁이의 매우 시야각이 나쁜 좌석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표를 집어 던진 후 나가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참았다. 그래도 영화를 볼 수 있다. 화장품 광고며 조미료 광고따위가 한참이나 화면을 점거했다. 사람들은 마치 그 광고들을 보러 온 사람들 마냥 화면에 시선을 맞춘 채 잠자코 있었다. 광고가 끝나고 극장 안이 칠흑에 휩싸였다. 아랫편 좌측과 우측의 귀퉁이에 밝혀진 각각의 푸른 불빛만이 선명했다. 아버지는 귓속말로 그 양 귀퉁이를 가리키며 불이 나면 그 쪽으로 뛰어가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양 쪽의 비상구를 번갈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 불빛을 따라 나가면 구원 받을 수 있나요. 안전한 삶이 거기에 있나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영화가 시작되었다.
흑백 영화는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영화가 아니었다. 흑과 백 사이에 놓인 수 천가지의 무수한 빛의 스펙트럼이 화면 속에서 구현되고 있었다. 이분법적인 세계 혹은 이원화된 세계란 가능할까.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믿음과 의혹. 진실과 거짓. 옳음과 그름. 관심과 무관심. 남한과 북한. 서양과 동양. 나와 너. 지구와 우주. 사람들은 끝없이 무엇과 무엇을 대적의 관계로 두고 이것과 저것의 차이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차이와 차이없음을 함께 지니고 있었으며, 다만 정도와 비율을 부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을 뿐이었다. 완벽한 이원화란 완벽한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간은 굳이 나와 다른 타자를 만들려고 애썼다. 타자를 분명히 함으로써 나를 구체화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어린 시절의 나는 끝없이 아버지를 타자화했던 것일까.
영화 속의 킹콩과 여주인공 앤은 흑과 백으로 구별되었지만, 킹콩에게도 백이 있었고, 앤에게도 흑이 있었다. 백은 순결함과 문명을, 흑은 원초적 욕망과 야만을 상징했다. 물론, 어린 시절의 내가 그런 것을 이해하고 직사각형의 스크린을 바라보지는 않았으리라. 다만 환하게 빛을 내뿜는 직사각형 속에 갇힌 채 울부짖는 거대한 검은 원숭이를 보며, 그 짐승에게 깃들어 있던 짙은 애수에 마음이 흔들렸을 따름이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 동등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열망. 그것은 구 유럽을 떠나 총 한 자루씩만을 휴대하고 아메리카 대륙에 당도한 프로테스탄트들의 강렬한 꿈이자, 자신들이 떠나온 유럽에 대한 영원한 노스텔지어와 다름 없었다. 그리고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의 국가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이상의 세계와도 같았다. 검은 국가들은 모두 백인의 나라가 되고자 했다. 수 많은‘나'들이 모두 ‘너’가 되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영화에 집중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이따금 흘깃거리며 훔쳐보았다. 아버지의 가슴에도 그런 열망이 피어나고 있기를 기대하며. 앤을 구하러 가고자 하는 열망이. 앤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솟구치기를 염원하며. 어떤 환희가 아버지의 표정에 떠오르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쓸쓸한 낯빛으로 가만히 눈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스크린의 어딘가에 드넓은 바다가 감추어져 있어서, 마치 그곳으로 조그만 강줄기를 이어 놓은 듯이. 당신의 수원에서 아주 조금씩 물을 흘려보내며 자기만의 바다를 쌓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낯선 바다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두 발의 핵폭탄으로 종결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나라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한민국으로 옮겨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