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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건너지 마시오

멀고느린구름 2011. 9. 19. 21:20


건너지 마시오


   음 그렇다. 저건 ‘건너지 마시오.’다. 분명히 횡단보도에서 검은 색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지면 ‘건너지 마시오.'라는 뜻이다. 주황빛처럼 건널까 말까도 아니고 명백히 거기 멈추라는 뜻이다. 단호하고 결의에 찬 빛깔이다. 200미터쯤 떨어진 거리에서 초록불빛을 발견하고 우사인 볼트마냥 전력 질주해왔건만 코 앞에서 신호등은 빨간불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도무지 세상은 불공평 투성이다. 모든 것이 운에 의해 좌우될 뿐 사력을 다해 노력해온 사람에게는 좀체 마땅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다. 툴툴거리며 횡단보도 앞에 서있자니 마음 속에서 악마가 마이크를 잡는다. “이봐, 바보냐. 그냥 건너라고. 시간이 아깝다 정말. 보라고. 차도 한 대 안 다니잖아. 게다가 여긴 정식 횡단보도도 아니잖아. 속 터지니까 어서 건너버려!” 그렇다. 악마의 말이 맞다. 내가 선 이곳은 정식 횡단보도가 아니다. 남부터미널 역에서 버스가 빠져나오는 출입구에 설치해둔 간이 횡단보도일 뿐이다. 이편에서 저편까지의 거리는 고작 6미터도 채 되지 않는다. 사력을 다해 점프를 한다면 단 두 번만에 주파할 수 있는 거리에 불과하다. 천사가 마이크를 잡는다. “에헴 에헴. 저기요… 으악.” 천사의 마이크를 가로채버리고서는 괄약근에 힘을 준다. 단숨에 건너버릴 테다. 일말의 양심이 남아 주위를 둘러본다. 지나는 사람이 없다. 옳지. 다시 한 번 신호를 확인하다. 선명한 붉은 빛. 크크크.

   고개를 떨구고 신호를 외면한 채 발을 내딛는다. 그런데. 앗! 눈을 내리깔던 중 눈 앞에 한 노인의 심드렁한 얼굴이 포착된다. 깜짝 놀라 내딘 발을 거두어 들인다. 심장이 쿵쿵거린다. 야훼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이 된 심정이다. 내가 뭘 그리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그저 배가 고파서 사과가 먹고 싶었단 말입니다. 우리 그냥 사과 먹게 해주세요. 라고 울고 싶은 기분. 노인은 푸른 빛이 감도는 낡은 제복을 입고 붉은 스트라이프 무늬가 새겨진 넥타이를 메고 있다. 경찰모 같은 검은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무료한 표정으로 내쪽을 건너다 보고 앉았다. 굳게 다문 입, 검게 그을린 주름진 얼굴, 모자 챙의 그늘 속에서  두 눈빛만이 묘하게 날카로이 생기를 띠고 있다. 그 눈빛은 나를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비난하는 것 같기도 하다. 노인의 나이는 60대 초중반 즈음일까. 아버지보단 많고 할아버지보단 적은 애매한 나이다. 나는 그를 아버지에 대입해야 하나 할아버지에 대입하여야 하나. 물론 이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래, 알고 있다.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저 신호등이 초록빛으로 바뀌기 전에 이 횡단보도를 건너냐 마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그 문제는 100일이 된 여자친구와 잠자리를 같이 하느냐, 혹은 200일까지 참아보느냐의 문제와도 유사하다. 그래, 사람에 따라 100일이 10일이 되고 200일이 11일이 될 수도 있는 문제이긴 하다. 나는 현재 여자친구가 없으므로 다행히도 그 고민에서는 해방되어 있는 상태지만 제길.

   신호등따위, 지구의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의 인성을 말살하는 기계문명따위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다. 허나 저 노인의 눈은 쉬이 외면하기 어려운 강력한 포스를 뿜고 있는 것이 아닌가. 노인은 나를 보지 않고 있는 척하면서도 노련하게 나를 경계하고 있다. 두 팔을 나른하게 늘어뜨린 채 미동도 않고 있지만 내가 횡단보도의 흰 선을 하나라도 밟는 순간 저 무거운 몸을 엄숙하게 일으킬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머쓱하게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야 하는가. 아니면 청춘의 반항기를 뽐내며 사정없이 노인의 안면을 노려봐주어야 하나. 그도 아니면 노인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초스피드로 횡단보도를 건너 지평선까지 사라져가야 하나. 아아, 어느 것 하나 쉬운 선택지가 없었다. 상당히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신호는 바뀌지 않는다. 고장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좀 더 떳떳해질 수 있다. 설령, 진짜 고장난 것이 아니더라도 능청스럽게 “아, 죄송합니다. 고장난 줄 알고요. 하도 안 바뀌니까 말이죠. 허허허.”라고 둘러댈 수 있을 것이다. 이건 괜찮지 않나 싶었다. 악마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가자. 노인이 일어나 다가오면 대충 둘러대고, 그래도 시비를 따지면 거세게 윽박질러버리면 그만 아닌가. 발을 내딛었다. 횡단보도의 흰선을 밟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노인은 변함없이 무료한 표정으로 내가 길을 건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쩐지 서글퍼졌다. 노인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겠는가. ‘내가 제복을 입고 경찰모 같은 걸 쓰고 있는들 무슨 소용인가. 젊은 놈들은 나를 사람 취급도 안 하잖아. 내가 이렇게 두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도 저녀석은 태연하게 길을 건너고 있어. 빨간 불인데, 빨간 불인데도 말이야. 내 인생은 끝난 거야. 이봐 젊은 놈! 그래도 알아둬. 나도 네 놈 같은 청춘이 있었어. 나도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다구!’ 울컥 눈물이 치밀어 오를 것만 같았다. 횡단보도 중간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아, 그러나 여기서 돌아간다 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이미 노인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난 이미 에덴을 떠나온 거야. 천사와 손을 놓아버린 거야. 지나가버린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다. 발을 내딛은 이상 오로지 전진. 나는 극심한 죄책감에 휩싸인 채 횡단보도를 다 건너버렸다. 낯이 뜨거웠다. 노인은 어떤 표정일까.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 차마 돌아볼 수 없어 경직된 걸음으로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다. 괜히 돌아보았다가 그 순간 신호등이 초록빛으로 바뀌기라도 하는 날에는 평생의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50미터 정도를 앞으로 나아갔을까,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신호등은 이제서야 붉은빛에서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노인은 여전히 무료한 표정으로 횡단보도 쪽을 이윽이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이어서 노을이 거리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께를 올려다보았다. 붉어진 하늘에 성자 같은 커다란 구름이 양떼구름을 이끌고 지나고 있었다. 아름답다고 느꼈다. 고개를 내리고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한 번 살핀 후 뒤돌아 걸었다. 그러다 다시 노인 쪽을 한 번 뒤돌아보았다. 노인이 하늘을 올려다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2011. 9. 1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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