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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아버지와 킹콩 1

멀고느린구름 2011. 7. 13. 21:00


아버지와 킹콩




1


  아버지와 킹콩을 보러 갔던 적이 있었다.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이 남아 있다. 어째서였을까. 아버지는 다정하게 자식의 손을 잡고 영화관따위를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보았던 커다란 영화관의 스크린, 흑과 백으로만 구성된 영화, 조악한 킹콩, 그리고 영화에 진지하게 몰두하며 긴장하고, 웃고, 울기도 하던 아버지의 표정.

  어른이 되어 다시 킹콩을 찾아보았다. 그때의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세월만을 살아왔다. 아주 가끔씩 이해해보려한 적은 있었다. 그때마다 ‘역시 이해 못해.’라는 결론만을 얻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낭비할 시간은 없는 시대였다. 


  1492년 10월 12일,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감히' 발견했다고 선언하며 시작된 ‘아메리칸 드림'은 600여년간 지속되고 있었다. 다들 여기에 있지 않은 것들만을 좇았고, 좇아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2등 시민이 되었다. 민주화 혁명, 정권 교체 이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삼성은 대학생들이 취직하고 싶은 곳 1위를 유지했다. 그것은 그대로 젊은이들의 ‘꿈'이 되었다. 꿈을 이룬 사람들은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 위해 많은 것들을 버렸고, 꿈이 진정한 가치임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책들을 지어냈고, 꿈꾸고자 하는 청년들은 자기계발서라는 이름의 매뉴얼을 읽어내려갔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삼성의 숱한 계열사들에 입사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볼 때마다 오로지 그곳에 입사하는 것만을 꿈꾸어 왔다고 ‘솔직한' 고백을 했다. 하지만 나의 고백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꿈은 등급을 낮추며 다른 꿈으로 이어졌다. 내가 포기한 등급의 꿈에는 보다 좋은 출신 성분을 지닌 계급의 청년들이 도전했고 권좌를 차지했다. 아니 더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다. 권좌에 앉은 자들은 그것을 ‘공평'이라고 불렀고, 때로는 ‘사회정의'나 ‘기회의 균등'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죽지 않은 채 쫓겨나는 사람들. 사라지는 마을들에 사람들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뉴스의 꼭지가 할애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제 뉴스에 보도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이나, 어머니의 실종도 뉴스에 보도되어야만 했다. 


  아버지의 투병생활은 티비의 어느 채널에서도 다루지 않았다. 공중파에서는 물론 심지어 지역 유선방송에서도 말이다. 그러니 내가 죽음을 한 달여 앞두고서야 아버지의 병을 알았다고 해도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혹은 그렇게 생각되기를 바란다. 


  하얀 병실에 누운 아버지는 말을 거부하고 있었다. 의사는 암세포가 목을 타고 번져가고 있는 탓이라고 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필연이 아닌 ‘거부'임을. 아버지는 나에게 시위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너는 어째서 이렇게 늦게 온 것이냐고. 나는 아버지에게 왜 언론사에 제보하지 않았느냐고 타박을 주려다 참았다. 아버지의 눈동자는 이따금 내쪽을 바라보다 이내 창문 너머의 허공으로 옮겨 갔다. 허공으로는 종종 까치며 비둘기들이 홀홀 단시 날아다녔다. 아버지는 새에게 자신의 영혼을 이입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낭만적인 사람이니까 말이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그런 점을 유전으로 물려 받은 게 못마땅했다. 어째서 중요한 면접을 앞두고도 대기석 앞에 놓여 있던 조그만 스위트피 화분에 이끌려 순번을 놓치는 일따위를 겪어야 했던가. 책을 읽기 시작한 이래로 문학서적따위는 절대 읽지 않았다. 경제학, 논리학, 통계학, 물리학, 자기계발서 등이 나의 책장을 차지했다. 사람들은 나의 책장을 보며 퍼렇게 질린 얼굴로 나를 냉혈인간이라고 하거나, 피도 눈물도 없겠다는 표현을 하고는 했다. 나는 그런 평가들에 쾌감을 느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그것이 바로 내가 인류에 퍼뜨리고 싶은 궁극적 인간상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시대와 불화하는 척하며 시대와 결탁하려 애썼다. 어째서 그러는가. 불필요한 포즈를 없애고 간결해지자 싶었다. 나는 시대와 당당히 결탁하는 인간을 표방했다. 인간의 생은 지구의 생이라든가, 우주의 생과 비교하면 너무도 보잘 것 없어서, 옷에 붙은 보풀을 아무렇지 않게 불어 날리듯 한 순간에 없애버러도 무관할 것이었다. 

  아버지로 말하자면 옷에 붙은 보풀에게 말을 걸어 넌 어디서 왔니라고 물어본 후 조심스레 떼어 반지고리함에 수집해둘 정도로 피곤한 인물이었다. 아버지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정상이 아니었는가, 지능이 모자랐는가 곰곰 떠올려봐도 명확해지는 것은 없었다. 그런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으로 직장에 출퇴근을 하는 월급쟁이였던 것을 떠올려보면 세상도 어느 정도 비정상의 부분이 있음에는 틀림 없었다. 

  새만금 간척사업을 막기 위해 수 백명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전라도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을 하며 오는 것을 보면 분명 이 시대와 불화하고자 하는 모종의 세력이 존재함은 명백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시대는 시대고 불화는 불화였다. 새만금은 간척되었고 거대한 갯벌은, 세계 3위의 갯벌이며 해양 생물의 보고이자, 천연기념물 철새들의 낙원이라던 세계는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것을. 농토를 만들겠다던 그곳에는 4년이 지난 지금껐 아무 것도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다. 

  

  콜롬부스의 깃발을 따라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프로테스탄트들은 ‘인디언'이라고 잘못 불리운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울타리를 쳐서 미국을 건설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태평양을 건너 꿈의 대륙에 당도했다. 그러나 진정 그들은 ‘무엇을' 만들었는가. 민주주의, 패스트푸드, 헐리우드, 마이크로 소프트, 이것들이 그들의 생산품목인가. 그들은 ‘그것을' 만들었는가. 그것이 없으면 인간이란 종은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일까. 새만금은 반드시 갯벌이 아닌, 농토이거나 골프장이 되어야 했는가. 그것이 인간이란 ‘종의 보존'에 기여하는가. 

  쾌락은 새벽녘의 이슬처럼 동이 트면 이내 증발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일찌기 싯다르타는 오직 ‘지금'만을 위해 살라고 가르쳤다. 오직 지금만을 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이란 무엇인가. ‘오직'이란. ‘위하다'란. ‘산다'란. 그런 말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말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었다. 스티븐 호킹은 신의 존재를 회의했다. 우주의 역사는 135억년이고, 모든 입자들은 135억년 전의 폭발로부터, 그 이전의 급작스런 시공간의 팽창으로부터 탄생했고, 인간의 평균 수명 동안 매일매일 로또에 당첨될 정도의 확률에 의해 별이 탄생했다. 그가 설명한 우주의 탄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왜 폭발이 일어나야 했는가, 왜 갑작스런 팽창이 발생했나, 그 이후 입자들은 왜 전자기장으로 힘을 지니고, 그것을 통해 서로를 끌어당겼는가. 왜 어떠한 배열은 포유류를 만들고, 어떠한 배열은 금속을 만들어 냈는가. 공룡들은 왜 존재해야 했고, 왜 다시 화석이 되어 인간의 문명에 봉사하게 되었는가. 의미 없음. 불가지론. 세계는 다만 무수한 가능성들을 펼쳐 보이는 창백한 백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더더욱 시대와의 불화 같은 불필요한 행위는 만용에 불과한 것이다. 


  젊은 날 아버지는 노조에 가입했고, 노조 위원장이 되어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출근하는 날이 잦았다. 이내 아버지는 해고 되었고, 아버지가 쫓겨나자 거짓말처럼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는 대박을 터뜨렸다. 전직원에게 300%의 보너스가 주어졌고, 노조의 동지들은 연락이 두절되었다. 아버지는 쫓겨나면서 받은 반토막 티직금으로 헌책방을 차렸고, 창가에 조그만 허브 화분들을 진열하는 취미를 습득했다. 한 달에 간신히 70만원 남짓의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아버지는 거기에 만족했으며 기억하는 한 노조원들을 한 번도 욕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온종일 책방에 앉아 1980년대에 출판된 책들을 읽었다. 가끔은 1970년대나, 1960년대로 거슬러 오르기도 했다. 책방은 볕이 잘 들지 않고, 환풍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틀림없이 아버지가 폐 관련이나 기관지 문제의 병을 앓게 되리라 예상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그것은 ‘예상'이었지 ‘기대'가 아니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가까스로 졸업하고 지역의 정원 미달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는 소설을 써야겠다고 선언했다. ‘쓰겠다’가 아니라 ‘써야겠다’였다. 마치 나 때문에 오래 미뤄온 일인 양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단 한 문장밖에는 쓰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고,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다음 문장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계속 펜을 쥐었다. 언젠가는 글이 자신을 찾아올 것을 대비한다는 자세였다.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어머니처럼 당신에게 글은 영영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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