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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소설을 쓰기 위해 필요한 시간

멀고느린구름 2011. 5. 30. 05:54

  내가 소설을 쓰기 위해선 최소한 두 시간이 필요하다. 어디까지나 '최소한'이란 기준에서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타자를 시작하기까지 이야기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상당히 필요하다. 그리고 실제 연재분을 기준으로 했을 때 타이핑을 시작하여 한 회분을 마무리하는 시간은 40분 남짓에 불과하다. 그외 1시간 20분 정도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그 사이 커피를 내리고, 음악을 선곡한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지난 회분을 읽고 있으면 슬슬 입질이 오기 시작한다. 첫 문장이 떠오르면 이때다 하고 줄을 당기면 된다. 어떻게 보면 낚시와 유사하다. 이러한 시간 요소를 고려할 때 적어도 내가 새벽에 글을 쓰고 출근하기 위해서는 새벽 4시에 기상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나는 지금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고 있다. 천성이 성실하기도 하고 게으르기도 한 인간이라 때로는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도 있다. 4시 반쯤 이불 속에서 빠져나와버리면 그날 글쓰기는 허탕이다.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해서 커피를 내리고, 음악을 고르고 책상에 앉으면 5시가 되어버린다. 그러면 1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는 초조함이 엄습해, 이야기를 기다릴 여유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이야기는 오지 않는다. 명상하는 수도승의 자세가 되어 집중하지 않으면 어떤 이야기도 써내려갈 수가 없다. 허공에 떠다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이야기의 실마리를 포착하려는 인간이 작가다. 그러므로 태생적으로 작가라는 직업은 예민한 인간들이 가질 수 밖에 없다. 

  혹자는 40분이면 쓰는 글이니 틈을 잘 노려 5시쯤 일어나서 써도 좋지 않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 그러니 내가 오늘 새벽 4시에 일어나 동물농장에 마음을 뺏겨 5시 10분에야 책상에 앉게 되었고, 커피를 망쳤고, 애플 랜덤곡으로는 서태지의 '필승'이 나오는 바람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이런 넋두리 글을 쓰는 게 아닌가. - 작가에게 시간이란 '다다익선'이 미덕이다. 돈도 벌고 글도 쓰면 될 텐데 굳이 목숨을 걸고 '전업작가'의 길을 걷게 되는 작가들이 발생하는 까닭이다. 

  이야기는 불현듯 온다. 내 스마트폰 메모 어플에는 아직 쓰지 못한 소설 아이템이 150여가지나 된다. 단편의 경우 생각나는 그 순간 써내려갈 수 있다면 가장 좋다. 하지만 전업작가이거나 대학생이 아닌 이상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시간이 지나버리면 내가 휘갈겨둔 메모가 뭘 의미하는 건지 나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될 경우가 많다. 또한 단편 아이템은 그 순간에 떠오른 감각이 중요한 경우가 많아서, 짧은 유통기한이 지나버리면 나중에는 도저히 쓰지 못할 것들이 많다. 그런 면에서 단편 쓰기는 대중음악 작곡, 혹은 사진과 비슷하다. 장편은 그나마 자체의 내적인 흐름이란 것이 있어서, 작가 자신이 작품과 트랜스한 상태만 비밀스럽게 잘 유지해주면 이야기들을 소환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소환하는 데에만 필요한 시간이 최소한 1시간 20분이다.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상태는 뮤즈를 만나 경제적인 부분을 떠맡겨버리고 나는 글쓰기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 잠깐, 뮤즈란 게 그런 의미였나? -  모든 예술가들이 꿈꾸는 이상이다. 허나 세상이 워낙 각박해져서 기초적인 연봉 정도는 벌어주지 않으면 연애조차 힘든 현실이다. 브랜드가 있는 예쁜 옷도 입고 싶고, 좋은 컬렉션 음반도 사고 싶고, 정기적으로 책도 사들여야 하며, 타루나 한희정의 공연 같은 건 반드시 참석해줘야 하니 정기적인 수입 없이는 생계를 지탱하기 어렵다. - 근데 예로 든 게 전부 생계와는 상관 없는 것들이잖아. - 그러므로 예술가도 세상살이의 고통 속에서 묵묵히 자기의 일을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몇몇 무지렁이님들께서는 '가난'을 알아야 예술이 나온다는 새만금에서 뻘 찾는 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영감이 들어와 앉을 자리가 없다. 대부분 - 분명 예외가 있다- 명작은 작가가 가장 여유롭고 행복한 순간에 '과거의 고통'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들이다. 고통에 허덕여서는 감정 과잉의 작품밖에 못 만든다. 고통을 넘어섰을 때 좋은 글, 좋은 음악, 좋은 그림이 나온다. 

  자, 여기까지 글을 읽어오던 분들은 이만큼 쓸 정도면 그 시간에 소설을 써도 되지 않았냐고 물어오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게 안 된다고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출근할 시간이 되었으니 모닝 넋두리는 여기서 마무리. 굿모닝! 

추신 : 이런 급작스런 마무리를 소설에서도 할 수 있다면! 


2011. 5. 3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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