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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새내기 시절 악명높은 K대의 음주문화를 접하고 진저리를 치며 대학생들의 잘못된 음주문화를 비판하는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나로 말하자면 1년에 한 두 번 술을 마시는 타입의 인간이다. 하지만 유전적인 요인으로 인해 주량은 상당한 편이어서 여지껏 제대로 술에 취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 그게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분명히 똑같이 마셨는데도 나는 전혀 마신 티가 나질 않는 것이다. 그러니 자꾸 사람들이 술을 권한다. 진심으로 소주 두 잔 정도에 밥상을 뒤엎는 정도의 인간이었으면 딱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제는 업무상의 일로 지역 언론사 기자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군청 직원들도 합세하여 서로 안면을 트자는 취지였는데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거기 있던 사람들 중 누가 군청 직원이며 누가 기자였는지조차 모르겠다. 그냥 그들이 파스텔톤의 하늘색, 분홍색, 초록색 옷을 마치 파워레인저처럼 깔맞춤해서 입고 왔다는 게 인상에 남았을 뿐.

한국사회에서 으레 남자 어른들의 술자리라는 것은 문화나 격조따위는 개집에 두고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제의 술자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술잔 돌리기에, 바꿔 마시기에, 폭탄주에... 불과 한 시간만에 나는 3병 가량의 소주를 흡수해야 했는데 심정적으로는 정녕 밥상을 엎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은 그들은 대체 왜 마시는가? 하는 실존적 물음이다. 서로 안면을 트기로 했으면 적당히 기분 좋게 천천히 자신의 주량에 맞게 술을 음미하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나누면 될 일 아닌가. 뭐랄까, "저기 대체 왜 그 학과를 지망하게 되신 겁니까?" 라고 질문을 하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면, 대답대신 "자 그럼 우선 한 잔"이란 말이 돌아온다. 그리고 내 질문은 어느 새 고독한 안드로메다로 홀로 여행을 떠나고 갑자기 옆의 상대가 바뀌어 있는 식이다.  술을 체내에 집어 넣는다는 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일이다. 혹자는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하는데 왜 당신의 스트레스를 나를 괴롭히는 일로 풀어야 하느냔 말이다.  나는 평소에도 늘상 만성적인 두통에 시달리는 인간이라, 두통이 없는 날만을 간절히 고대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스스로 두통을 발생시키는 일에 투신해야 하는가.  

대학에서 그 정도 수준으로 술을 배운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사회이니 뭐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싶지만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술마시는 품격이 과거 조선의 선비 정도는 못 되더라도 산적 수준으로 떨어져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지금 대한민국은 국격 운운할 것이 아니라 술자리의 격조부터 높여야 할 것이다.


2011. 4. 26. 해장 커피를 마시며.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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