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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대한민국에는 여성주의자라고 선언하는 여성보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성들이 참 많다. 고려대의 전 총장인 어윤대씨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시더니 학내 교수들의 성희롱 사건에 모르쇠로 일관하는 마초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셨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는 대한민국 남성들의 한 90% 이상은 여성주의자와 페미니스트가 같은 용어인지도 모르며, 여성학개론의 여자도 읽어본 적이 없는 부류이리라 추정한다.
'남성 페미니스트'가 가능한 존재인가라는 논쟁을 일단 유보하는 것을 전제로, 한국에 진짜 남성 페미니스트의 존재는 정말 희귀하고도 희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처럼 뒤늦게 돌(도가 아님)을 깨우치고 뭔가 해보려고 바둥거리는 이들에게 마땅한 동성 모델이 없는 것이다. 종종 TV에서 권해효 형님이 멋진 모습을 보여주시기는 하나 볼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적고,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없으니 답답하다.
그냥 여성주의자들의 모습을 배워라! 여성주의까지 남성에게 배우려고 드는 걸 보니 너는 역시 마초성을 버리지 못했어! 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거기에 대해 변명을 하자면 적어도 나는 남성 페미니스트에게 페미니즘을 배우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 같은 남성이 이 지독한 가부장 문화에서 어떻게 페미니스트로서 균형을 잡고 자신의 가부장성을 극복하고 있는가 하는 사례를 보고, 거기에서 힘을 얻고 싶은 것이다. 남성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스트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실제 여성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여러가지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남성에게는 여성주의적 감각이 떨어지기 때문에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부분에서 반 여성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을 경우가 많다. 과연 어떠한 부분에서 그런 숨은 가부장성이 남성의 몸(MOM)에 베어 있는지 그것을 극복한 동성 선배에게서 한 수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본받을만한 동성 선배에게 목말라 있던 나에게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라는 책은 내게 또 한 명의 정신적 스승 권혁범씨를 선물해주었다.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라는 책을 읽는 내내 통쾌한 기분에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책장을 넘겼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를 발견한 기쁨에 들떴었다. 물론, 아직 미처 깨우치지 못했던 돌을 깨는 계기도 되었다. 아! 맞아 이런 부분을 내가 놓치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부분 - 교원 양성 평등 채용제의 문제, 시상식에서의 성차별적 듀엣,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보이는 이별한 남자의 폭력성, 언론이 유도하는 보통 여성 이데올로기- 을 읽으며 역시 정신 차리고 살지 않으면 아차 하는 순간에 가부장 사회가 제공하는 남성 포대기 속에 다시 들어가고 말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이비 남성 페미니스트가 판 깨는 한국에서 여성주의자들에게 '당신은 괜찮아! 믿을만해' 라고 인정을 받은 얼마 되지 않는 남성 페미니스트 권혁범씨. 국내에서 새로운 여성주의의 출현을 알린 '또 하나의 문화'에서 그의 책이 나왔다는 게 그 인증의 증거이리라. <여성주의, 남성을 살리다>를 여성주의자나 여성들이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들이 읽기에는 너무 상식적이고 당연한 이야기들일 테니까. 허나 대한민국의 통계적으로 일반이라 칭해지는 남성들이 읽기에는 좀 불편한 이야기들일 것이다. 한 집단에게는 상식인 이야기가 한 집단에게는 대단히 불편한 이야기가 되는 대한민국. 이것이 사실 여성 상위 사회라는 헛소문이 떠도는 대한민국의 실제이다. 남성들은 그동안 너무 편하게 살았으니까 이 책을 읽고 좀 불편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마시라. 권혁범씨는 남성이니까. 아주아주아주아주 일부 남성들의 여성 혐오증을 해소할 대상이 아니라는 말씀. 그러니 당신이 그 아주아주아주 일부인 여성 혐오증 남성이 아니라면 흥분하지 말고 좀 차분하게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돌을 깨우쳐 갔으면 싶다.
여성주의자가 최종적으로 원하는 것은 남성주의자들이 원하는 것처럼 자기와 다른 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소외된 자들이 떳떳하게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고 독립된 주체로서 존중 받으며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는 게 대다수 여성주의의 이상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에게 이득이 되어주었던 일들, 국가주의, 사나이다움, 성욕 신화, 군사 문화 등은 다른 시각으로 보면 남성을 파국으로 치닫게 만드는 반남성적 요소들이다. 진정으로 남성을 살리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그 고민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해보아야 한다. 여기 하나의 대안을 실천해가신 선배가 있으니 그의 고민의 여로를 따라가보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대한민국의 불특정 그남들에게 진지한 일독을 권한다.
2008. 4/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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