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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리뷰

이윤기 -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멀고느린구름 2011. 3. 20. 22:04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2011)

Come Rain, Come Shine 
5.2
감독
이윤기
출연
임수정, 현빈, 김지수, 김중기, 김혜옥
정보
로맨스/멜로 | 한국 | 105 분 | 2011-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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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라는 말은 때론 다정하고 때론 무심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근원적으로는 긍정적 힘을 지닌 말임에는 틀림없다. 

괜찮아를 반복하는 남자와 그 말이 듣기 싫어진 여자가 있다. 하지만 그 여자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말도 결국은 "괜찮아."였다. 나는 "됐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 남자였다. 처음에는 상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한 번 두 번 "됐어. 내가 할게. 됐어. 괜찮아. 됐어. 그만 해도 돼." 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점점 상대에 대한 무시의 의미가 되었다. 됐어, 넌 원래 그런 애잖아. 됐어, 원래 넌 내 마음따위 잘 이해도 못하는 여자잖아. 그런 식이 되고 말았다. 

괜찮아를 반복하는 남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처음 괜찮아는 상대를 안심시키고 다정하게 끌어안는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그 말은 상대의 참여를 거부하고, 상대의 마음에 반응하고 공명하길 거부하는 태도로 변해 갔겠지. 괜찮아에 기대었던 여자는 모든 게 괜찮다는 남자의 표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영화는 공백해진 두 사람의 마음 사이를 연신 내리는 소나기의 빗소리로 가득 채운다. 어지러진 여자의 방과 자꾸만 무엇을 정리하려는 남자. 버리려는 여자와 버리지 못하는 남자. 여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진짜 남자에게 도달하고 싶어하지만 남자는 진짜를 보여주지 않는다. 바람난 여자를 위해 멋진 레스토랑 저녁 식사를 예약하고 화도 한 번 내지 않으며, 친절하게 군다. 커피를 내려 달라는 여자에게 커피를 내려주고, 파스타를 먹고 싶다는 여자를 위해 파스타를 만든다. 금슬 좋은 부부 같은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티격태격 자주 싸우지만 사실은 끈끈하게 맺어져 있는 부부들에게는 묘한 유대감이 풍긴다. 싸우되 서로의 극점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서로의 선을 분명하게 알고 정해진 룰 안에서 상대를 비난한다.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면서도 절대 깊은 상처를 입히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정해진 자리로, 그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잠시 싸우기 위해 여행을 나온 사람들처럼. 

하지만 이 여자와 이 남자는 서로의 음식 취향은 알지만 서로가 어디에서 상처 받았는가 알지 못한다. 모르는 것에 대해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침묵은 켜켜이 쌓여가고 침묵을 깨뜨릴 사람은 두 사람 외에는 없다. 어디선가 빗물이 새고 있지만 세숫대야를 받쳐서 바닥이 젖는 것을 막을 뿐, 실제로 어딘가에 있을 구멍을 막지는 못한다. 두 사람 모두 세어나가는 마음을 바라보고만 있다. 

이윤기 감독은 전작 '멋진 하루'를 통해서 참으로 멋진 영화를 선보인 감독이다. 멋진 하루는 21세기 들어 내가 본 최고의 영화들 중 한 편이었다. 많은 대사가 없어도 사람의 표정과 눈빛, 공간을 채운 공기, 빛의 흔들림, 낯선 카메라의 앵글 등으로 마음의 풍경을 표현해낸다. 이윤기 감독이 그려내고 있는 모든 공간은 사실 현실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사람 내부에 있는 마음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작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런 마음의 공간이 극대화된 작품이다. 영화 속에 등장한 공간이라고는 도입부의 차안과 헤어짐에 임박한 두 남녀의 집이라는 공간밖에 없다. 3층과 지하라는 생활 공간에서 드러나는 두 사람의 거리감과 혼돈과 정돈의 대비 등등. 마치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것 마냥 집안 곳곳을 황금비율로 비추는 앵글을 통해 생략되어진 남녀의 마음이 드러난다.

토요일 12시 이 영화를 보러 온 관객은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이었다. 그마저 두 사람은 중간에 지겨워서 못보겠다고 큰 소리로 말하고는 영화관을 나가버렸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겨워할 틈이 없는 영화인 것이다. 곳곳에 두 사람의 마음이 놓여 있다. 집 안의 가구들이, 책장에 꽂힌 잡지가, 여자의 방에 높다랗게 탑처럼 쌓여 쓸쓸해 보이는 소설책들이, 주방의 요리도구들이, 지하에 만들어 놓은 남자의 소품들이, 계단과 빗방울이, 햇살이, 고양이가 모두들 자기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애타게 말하고 있다. 왜 자기를 이해할 수 없냐고 왜 자기를 이토록 외롭게 만들어버린 거냐고 쓸쓸하고 낮은 목소리로,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주 작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당신이 그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당신이 이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아 정말 지겨워서 못 보겠어." 라고 말하고 영화관을 나선다고 해도 '괜찮다'. 그렇지만 영화관을 나서 계단을 내려가고 거리로 나서고 버스를 타거나 자가용을 타고 집에 돌아간 뒤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도 좋겠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는지. 아 지겨워서 이제는 못하겠어! 라고 소리를 질러도 좋을 정도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었는지.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은 역시 괜찮다. 부끄럽지만 난 아직 그런 삶을 살아오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그렇게 소릴 질러도 좋을 만큼 최선을 다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아프게 보았다. 듣지 않아도 될 것을 열심히 들었다. 보지 않아도 될 것을 구태여 찾아 보았다. 숨겨 놓은 말들까지 꺼내어 보았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어느 쪽이었는가. 




2011. 3. 20. 비가 내린 일요일.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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