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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리뷰

에쿠니 가오리 - 나의 작은 새

멀고느린구름 2011. 3. 11. 19:59

나의작은새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일본소설문학선
지은이 에쿠니 가오리 (문일출판,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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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  점수: ♥♥♥♡

 

"진짜로 병이 난 거니?"

이렇게 묻자 녀석은 좀 기분이 상했는지,

"그래, 진짜로 병이 난 거야. 진짜라구!"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럼 병원에 가야지."

하고 말하자, 아이고 맙소사 하는 듯히 한숨을 푹 내쉬더니

"정말이지 하나도 몰라주는구나."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병이라는 게 뭔지, 넌 하나도 모르고 있어."

'아-----, 싫다 싫어' 하는 말투였다.

"병이라는 건 말야, 하루 온종일 누워 있어야 하는 거야. 아무 데도 못 나가. 하루종일 누워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는 약을 먹고, 꼼짝 않고 쉬어야 하는 거라구."

설명을 마치더니 녀석은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이제 알았니?"

하고 물었다. 할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그리고 참고로 말해두는데, 그 약이라고 하는 건 말야, 럼주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이야."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내가 제대로 알았는지 확인해 볼래?"

녀석은

"그래, 좋아. 어서 말해 봐."

"넌 지금 몸이 아파. 병이 났어."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녀석은 고개를 끄덕끄덕 아래위로 움직였다.

"하루 종일 누워서 쉬어야 해."

녀석은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그런 너한테 나는 하루에 두 번, 약을 줘야 한다."

녀석은 '그래, 바로 그거야' 라고 말하는 듯, 크게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약은 럼주가 들어간 아이스크림."

녀석의 고개는 금방이라도 떨어져나갈 듯이 아래 위로 움직이고 있었다.

"음. 그렇구나 이제 알았어."

나는 마음이 놓여 가벼운 기분이 되었다.

"그건 그렇고, 근데 그 병은 언제쯤 낫는 거니?"

녀석은 끄덕거리던 고개를 바로 하더니 한참 동안 깊은 생각으로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하면서

"지금 예정으론 내일."

하고 말했다.

 

  위의 글은 사람과 사람의 대화가 아니다. 사람과 새의 대화다. 사람과 어느 날 갑자기 창문으로 날아들어와 함께 살게 된 새의 대화다. 쾌활한 여자친구가 있고 매일매일 회사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을 반복하는 평범한 남자에게 갑자기 날아든 새는 어떤 의미일까.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처음 서점에서 보았을 때, 역시 든 생각은 예쁜 사람이다였다. 그러면서 뭔가 희미하고 투명한 사람이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사람은 어떤 글을 쓸까 라는 궁금증이 들었을 시점에 그의 소설은 이미 대한민국에서 히트 상품이었다. 본능적으로 히트 상품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나는 결국 그의 작품에 손을 내밀지 않았었다. 그렇게 애써 그의 작품을 무시하고 사는 동안 내 주변에는 서서히 에쿠니 가오리 매니아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었다. 마치 에쿠니 가오리가 그 희미한 표정으로 내 주변을 서서히 압박해오는 기분이었다. 한 친구에게 한창 에쿠니 가오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주가 있었다. 그리고 그 주에 나는 서점에 갔고 혼령에게 떠밀리듯 에쿠니 가오리의 책들이 진열되어 있는 책장에 가 섰다. 그때까지도 히트상품 울렁증이 남아있던 터라 여전히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앗! 바로 그때 눈에 확 들어오는 책이 있었다. 그 책이 바로 '나의 작은 새'다. 나는 기뻤다. 이 책은 한 번도 베스트 셀러 코너라거나, 작가의 대표작 코너 따위에 진열된 걸 본 적이 없어! 거기다 표지까지 너무 예뻐!! 그대로 고이 책을 들고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마쳤다. 마이너 출판사에서 출간된 이 작고 귀여운 책은 그 모양 그대로 소소하고 잔잔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창문으로 무리를 잃은 새가 날아든다. 새는 교회에 가야 한다고 그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주인공은 회사 일 탓에 지금 당장 데려다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새는 시간이 날 때까지 집에서 기다려주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남자와 새의 동거는 시작된다.  

 

  일상이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사람을 무디게 만드는가. 처음에는 불타오르던 연애도 일정 궤도에 오르며 반복된 평화 속에 안착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종종 꿈을 꾼다. 나의 이 잔잔한 일상에 큰 파도가 치기를, 엄청난 이벤트가 펑 터지기를. 삶이 조금 더 극적이기를. 그렇게 무엇인가 갑자기 나에게 던져지기를 바란다. 이야기 속의 '새'는 그렇게 불쑥 던져진 존재이다. 그러나 그렇게 던져진 건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었다. 내 삶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조금씩 조금씩 톡톡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세심하게 관찰하고 살피지 않으면 다른 날들과 크게 다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은 특별한 사건이나 전혀 새로운 사람, 확연히 다른 느낌 들을 기대하는데 온 에너지를 소비하기에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들을 눈치 채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가 거시적 세계에만 눈을 모으고 있기에 우리의 일상이 변화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건 아닐런지. '작은 새'는 우리 삶의 미시적 세계에 눈을 돌리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의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서도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는지, 얼마나 예쁜 기쁨이 있는지 눈치 채게 해준다. 매일 먹는 음식의 맛, 집 가까이 있는 교회와 도서관, 빨래통이 돌아가는 모습, 진짜 발자국의 의미 등등. '작은 새'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놓치는 작은 것들을 그 조그만 눈으로 다시 확인시켜준다. 단지 한 마리의 '작은 새'가 집으로 날아들어 얼마간을 함께 살고 있을 뿐인데 한 권의 소설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이 솟아난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숱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면 한 번 창문을 열어보는 건 어떨까. 혹시라도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들지 모르잖는가. 당신의 마음에 맑고 작은 햇살 한 조각이라도 꽂힐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조그맣게 빛나기 시작할지 안 할지는 누구도 모르지 않는가. 

 

 

   

 2008. 1/1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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