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결국, 사람과 사람은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사람에게는 ‘말’이라는 도구가 주어졌지만 ‘말’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를 오해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믿는다. 믿지 않는다. 사실이다. 거짓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는 공기의 진동에는 물리학적 실체로서의 ‘정보'가 담겨 있지 않다. 정보는 오직 빛 -혹은 입자-를 통해서만 타자에게 전달된다. 포유류를 비롯한 짐승들은 위급한 순간 사용하는 단순한 몇 개의 음성신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빛'을 통해서만 정보를 전달한다. 인지과학자들은 이것에 ‘변연계 공명'이라는 까다로운 말을 붙여 사람들의 이해를 차단했다. 다시 표현하자면 변연계 공명이란 직감을 통한 전달이다. 뇌와 뇌, 눈빛과 눈빛, 마음과 마음 사이의 순간적인 대화이다. 아버지와..
4 아버지가 갑자기 응급 수술실로 들어갔다고 담당 간호사에게 연락 받은 것은 새벽 세 시경이었다. 나는 다음날 발표할 프리젠테이션의 키워드 색깔을 파란색으로 할지 초록색으로 할지 고민 중이었다. 파란색으로 하자니 검은색의 배경에 잘 어울리지 않았고, 초록색으로 하자니 계절과 맞지 않았다.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노란색으로 키워드를 색칠하고 대충 옷을 껴입었다. 집밖으로 나서니 서늘한 북풍이 뺨을 세차게 때렸다. 어느덧 10월이었다. 늦여름의 기운도 사그라들고 있었다. 차를 몰아 급히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1시간이 지나버린 4시 23분이었다. 그 사이 아버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있는 사실이 없었다. YTN은 정작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새벽에도 여전히 전세 대란..
2 젊을 때의 아버지는 좀 더 혈기왕성한 사람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에 분개하고, 광주학살에 눈물을 흘렸다.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서는 일이 많았다. 낭만적 세계의 건설을 위해서였다. 독재자는 사라졌고, 노동법은 준수되기 시작했다. 함께 싸웠던 몇몇은 민주화 투사의 훈장을 달고 정치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다만 원래의 장소로 돌아왔다. 곁에는 젊은 투사와 사랑에 빠진 소녀가 있었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하던 공장의 경리였다.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지만, 성공한 것은 아버지였다. 내가 태어났고 80년대는 사랑보다 빠르게 사라져 갔다. 현상에서 현실적인 요소들을 제거할 때만 ‘낭만성'은 획득되었다. ‘낭만성'이라는 꽃은 상상력이 허락되는 백지의 정원에서만 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낭만적이었으..
아버지와 킹콩 1 아버지와 킹콩을 보러 갔던 적이 있었다.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이 남아 있다. 어째서였을까. 아버지는 다정하게 자식의 손을 잡고 영화관따위를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보았던 커다란 영화관의 스크린, 흑과 백으로만 구성된 영화, 조악한 킹콩, 그리고 영화에 진지하게 몰두하며 긴장하고, 웃고, 울기도 하던 아버지의 표정. 어른이 되어 다시 킹콩을 찾아보았다. 그때의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세월만을 살아왔다. 아주 가끔씩 이해해보려한 적은 있었다. 그때마다 ‘역시 이해 못해.’라는 결론만을 얻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낭비할 시간은 없는 시대였다. 1492년 10월 12일, 콜롬부스가 아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