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는 이번에도 10미터 간격을 유지하며 여자를 따라갔다. 여자는 딱 한 번 멈춰 서서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오랫동안 통화를 하긴 했지만 그 외엔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부지런히 여자를 따라가다 보니 여자가 어디로 가는지 어느 순간 분명해졌다. 바람이 신선했다. 바람이 가는 곳은 여름의 끝일 터였다. " - 조해진 194P 여름을 지나가고 있다. 바람은 차가운 곳에서 뜨거운 곳을 향해 분다. 대류 현상 탓이다. 공기는 풍부한 곳에서 희박한 곳으로 움직인다. 뜨거워진 공기가 대기의 상층부로 올라가버린 빈 자리에 상대적으로 차가운 공기가 흘러와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바람이 가는 곳은 여름의 끝"이라는 말을 한참 동안 생각했다. 여름의 끝은 어디일까. 지구의 적도 부근이 역시 여름의 끝인 것일까. 계절..
오후만 있던 일요일 내내 비가 온다. 길 위로 엎질러진 네온이 흐른다. 꼭, 밟으면 신발 둘레에 알록달록하니 묻어날 것만 같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거리의 요란한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소리가 볼륨을 줄인다.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다 꽂는다. 이어폰 줄에 매달려 있는 리모컨을 이용해 음악을 켠다. 들국화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 전인권 씨의 슬픔이 끓는 듯한 목소리가 차분한 투로 들려온다. 노래 마디마디에 빗줄기 소리가 새어들어왔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예쁜 비가 내렸네… 생각없이 걷던 길 옆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일요일은 늘 오후만 있는 것 같애. 재현이 말했다. 음, 그런가? 재현이 피식 웃었다. 학교 도서실은 여전히 허술하게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익숙하게 문예부 쪽으로..
그리움의 풍경 비가 개이고 하늘이 멀어졌다. 잠시 푸른 벌에 널어두었던 흰 빨래를 하나 둘 걷어 다시 내 방 한 켠 가시나무 같은 옷 걸이에 걸어두었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빨래를 말리려고 선풍기를 켰다. 여름이 웅웅 울며 제 몸에 남아있던 먼지를 뿜었다. 쓸모없는 기억들, 버려야할 찌꺼기들이 방 안 가득 찼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을씨년스런 가을비의 냄새를 지우려 라디오를 틀어보았다. 치직. 잡음은 몸을 낮춰 방바닥을 흘렀다. 주파수를 살짝 돌리자 곧 익숙한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어느 주파수를 잡던 비슷했다. 창 밖의 멀어진 하늘은 누가 죄다 구름을 걷어 갔는지 시리게 파랬다. 창문을 열었다. 집 근처의 공사장에서 작업하는 소리가 들렸다. 탕탕 위잉. 고단한 소음들. 라디오 속의 가수는 가슴 ..
얼마가 지난 걸까. 카누를 타고 노를 저어 달빛에 물든 강물의 한 가운데까지 나아갔다. 술잔을 물결 속으로 담궈 달빛을 길어올리다 황금물결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온 몸이 젖었고, 양볼을 개구리처럼 부풀린 채 깊은 강물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황금의 빛은 점점 사라지고 공포스런 어둠이 사방을 휘감았다. 물은 점점 차가워졌고, 온 몸이 얼어붙기 시작한다고 느낀 순간 정신이 들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이다. 온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돌았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다. 10분 정도 잠이 들었다. 하지만 어쩐지 전혀 다른 시간 속을 살다 돌아온 기분이었다. 앉아 있던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 일어 한 번 주저앉고 말았다. 두 번째 일어날 때는 이상이 없었다. 커..
자폐증 비눗방울 아이 공기가 얼어붙는 겨울 밤 하늘에 0.1초 전에 생긴 비눗방울 하나가 날아다닙니다. 안녕하세요. 나는 0.3초 전에 생긴 비눗방울이지요. 비눗방울은 자폐증에 시달리는 어린아이처럼 사람들의 손길을 피해 바람과 바람 사이를 떠돕니다. 제발, 내 몸에 손을 대지 말아요. 당신이 금방 손을 씻고 왔다고 해도 저는 느껴요. 당신 손에서 나는 지독한 비린내를요. 당신 손의 그 더러운 표정을 봐요. 언제라도 나를 만질 권리가 있는 것처럼 나를 보고 있잖아요. 비눗방울은 거리에 나온 사람들의 머릿카락 사이를 날아다닙니다. 비눗방울은 이대로 하늘로 오르고 올라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저 먼 별에까지 닿기를 꿈꾸어 봅니다. 나는 저 달로 갈 거에요. 나는 알아요. 저 달에 토끼가 산다는 건 어른들의 ..
- 앨버트 독 - 저녁 7시가 넘으면 불빛은 이곳 리버풀 항에만 남아. 여기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7시면 모두 집으로 돌아와 거실 한 군데만 희만 불빛을 켜두고 각자의 하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나는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시간이면 불나방처럼 빛을 좇아 리버풀항으로 가. 떠나는 사람과 돌아올 사람들을 위한 공간. 아주 오래전 아프리카에서 온 검은 사람들은 이 항구에서 영국 각지로 노예가 되어 팔려갔다지. 수백년 전의 그들의 얼굴이 아직 이 항구에 남아 있어. 그곳에 서서 검은 바다를 보면 어쩐지 단 한 번 만난 적도 없는 그네들의 얼굴이 떠오르거든. 어쩌면 내 피 속에 나도 모르게 아프리카가 스며들었는지도 몰라. 이곳에서는 기상을 점치는 내기를 할 수 없겠어. 365일 중에 300일 이..
- 바닐라 - 한 때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던 강아지 인형이 있었는데, 그 강아지 이름은 아마 바닐라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디로 간 걸까. 혹은 언제 간 것일까. 방학이 되어 오랜만에 돌아온 집에서 하루 종일... 나는 바닐라를 찾고 있다. 10년이나 넘게 잊고 있던 것이 왜 갑자기 이리도 중요해진 것일까 자문해보지만 딱히 답은 없다. 다만 지금은 바닐라의 까맣고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내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을 뿐. 책상 서랍과 옷장 구석구석. 침대 밑. 심지어 찬장 속과 김치 냉장고 안까지 들여다보았으나 바닐라는 없다. 엄마는 내가 아침부터 수선을 피우는 걸 보며 "우리 새끼가 드디어 제 손으로 방 청소를 하네." 라며 대착각 중이어서 바닐라의 행방을 섣불리 물을 수도 없다. 결자해지라는 사자성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