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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는 이번에도 10미터 간격을 유지하며 여자를 따라갔다. 여자는 딱 한 번 멈춰 서서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오랫동안 통화를 하긴 했지만 그 외엔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부지런히 여자를 따라가다 보니 여자가 어디로 가는지 어느 순간 분명해졌다.
바람이 신선했다.
바람이 가는 곳은 여름의 끝일 터였다. "
- 조해진 <여름을 지나가다> 194P
여름을 지나가고 있다. 바람은 차가운 곳에서 뜨거운 곳을 향해 분다. 대류 현상 탓이다. 공기는 풍부한 곳에서 희박한 곳으로 움직인다. 뜨거워진 공기가 대기의 상층부로 올라가버린 빈 자리에 상대적으로 차가운 공기가 흘러와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바람이 가는 곳은 여름의 끝"이라는 말을 한참 동안 생각했다. 여름의 끝은 어디일까. 지구의 적도 부근이 역시 여름의 끝인 것일까.
계절은 지구가 23.5도 기울어진 채 자전하기에 생긴다. 햇빛이 낮동안 비춰지는 시간의 차이가 계절을 결정한다. 한국이 속한 북반구의 여름에는 한국에 해가 오래 비추는 반면, 북반구의 반대편 남반구에 위치한 호주와 남미, 남아프리카 등에는 해가 가장 짧게 머무르는 겨울을 맞는다. 북반구 국가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눈이 내리고 털옷을 입은 풍경이지만, 남반구의 크리스마스는 선글라스를 끼고 해변에서 수영복 차림에 서핑을 즐기는 풍경이다.
지구의 여름은 북반구의 사람들에게 머물다가 서서히 아래로 이동하여 10월 즈음이면 남반구에 이른다. 차가운 곳에서 뜨거운 곳을 향해 불어가는 바람의 속성만을 참고한다면 바람은 언제나 여름의 뒤를 쫓고 있는 셈이다. 결국, 바람이 불어간 곳은 여름이 옮겨 간 남반구의 어느 나라이다. 그곳에는 여름의 끝과 시작이 동시에 있다.
<여름을 지나가다>는 2015년 8월 31일에 발간되었다. 여름의 끝에 책이 나온 셈이어서, 곧바로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가을에 여름의 이야기를 다시 읽었을 것이다. 나는 지난 가을 이 책을 서점에서 보고 인상적인 표지에 마음이 이끌려 한참을 바라보고 만져 봤던 기억이 난다. 다음 해 여름이 오면 아마 이 책을 집으로 데려오지 않을까 하는 예감을 느끼며, 서점을 나왔었다. 예감은 적중했다. 지난 5월 말, 여름의 시작과 함께 서점에서 다시 이 책을 마주하고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초여름을 이 책과 함께 보냈다.
<여름을 지나가다> 속 두 주인공 '민(女)'과 '수(男)'는 6월부터 8월까지 묘한 인연으로 엮여진 채 여름을 지난다. 민은 정규직 사원이었다가 회사의 비리를 공개하려는 약혼자와 반목하다 파혼과 함께 스스로 사표를 내고 비정규직 부동산 중개업자가 된 30대 여성이다. 수는 신용불량자로서 취업의 제한을 받자 우연히 획득한 주민번호를 도용하여 타인의 이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20대 초반 남성이다. 두 사람은 함께 여름을 난다. 수의 아버지가 운영하다가 문을 닫게 된 목공소라는 장소를 공유하며. 셔터가 내려지고 어둠으로 가득 찬 여름의 폐목공소를 민은 담당 중개업자로서 드나들고, 수는 아들로서 드나든다.
세상에서 격리된 페목공소에서는 밖의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아무도 그 속에 누군가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처럼 폐목공소는 안팎으로 안전(?)하다. 먼저 세상에 나가본 민은 이곳에서 태초의 어둠(평안-자궁)을 느끼고, 세상에 나가볼 기회조차 박탈당한 수는 미래의 어둠(불안-공포)을 느낀다. 평안과 불안이 공존하는 폐목공소는 결국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른 곳이 된다.
두 사람이 숨어 있는 목공소 밖의 여름은 과연 지나갈까. 6월이 가고, 7월이 가고, 8월이 가며. 많은 괴로운 시간과 순간의 실수들이 결국 과거의 일이 되는 것처럼 여름은 과연 지나갈까.
어느 시절에 나는 여름을 무척 증오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절에는 여름을 사랑하게 되었다. 여름 속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생각도 오락가락했다. 우리가 지금 당장 모든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한, 모든 것은 변해간다. 설령, 내가 움직임을 멈춘다고 해도, 다른 것은 움직인다. 내가 억지로 숨을 멈춰도 내 속의 심장은 저대로 뛴다. 무엇이 움직이고 변해가는 한 시간은 흐른다. 시간은 저 혼자 흐르지 않고, 커다란 강물처럼 여러가지 것들을 싣고 흐른다.
다시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겨울이 있었다. 나는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 위에 사랑을 내다버렸다. 하지만 몇 번의 겨울이 되돌아오더니 사랑도 되돌아 왔다. 누군가를 또 사랑하게 되었다. 고난과 같았던 여름은 과연 지나갈까. 수가 바라던 정규직이 되고, 민이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게 되면 여름은 영영 오지 않게 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래도 여름은 다시 온다. 우리는 분명히 지나보낸 여름을 언젠가 다시 또 마주하게 될 것이다. 또 언젠가 무더운 여름을 지나가게 될 것이다. 매달 30만 원을 벌어 살던 20대의 내가 만난 가난한 여름을, 100만 원 단위를 넘는 돈을 벌게 된 30대의 나도 여전히 만난다. 수는 민이 되고 민은 그 다음의 누군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인물 만큼의 혹은 시절 만큼의 여름이 이 세상에는 준비되어 있다.
무덥고, 땀이 흐르고, 걷기가 힘들고, 인상을 찌푸리게 되며, 사람과 가까이 하고 싶지 않으며, 구태여 어디로도 나가고 싶지 않은 여름이다. 하지만 매미가 울고, 초록이 짙고, 바다가 따스하며, 빛이 가득하고, 밤은 차분하며, 바람이 반갑고, 하늘은 가까이 내려와 다정한 여름이다. 그런 여름을 지나고 있다. 마음껏 짜증을 내고, 마음껏 좋아해주자. 아무튼 올 여름은 해도해도 너무 더운 것 같지만, 여름이 언제 그러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청춘이나 사랑이 언제 그러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2016. 7. 3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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